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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 카이에 소바주 1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평점 :
신화는 종교의 열광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신화는 비합리적인 논리를 매우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비합리의 경계선 바로 앞까지 접근하면서도 그 선을 넘어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사고의 힘이 철저하게 작용해서 신화를 이성의 영역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국가라는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사회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_ 나카자와 신이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p31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서 신화를 인류가 최초로 도달했던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철학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근대적 이성(reason)이 잃어버린 총체적 사유, 즉 '야생의 사고(pensee sauvage)'의 원형이 신화 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이를 향한 근본적 회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저자는 '신화=인류 최고의 철학'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근거로 든다. 계모와 이복동생에게 구박받는 주인공, 마법을 사용하는 조력자, 왕궁 무도회, 그리고 '신발'이라는 신표(信標)를 통한 신원 확인. 저자는 이런 구체적이고 복잡한 구조가 여러 문화권에서 우연히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을 리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의 강력한 원형 이야기가 시공간을 넘어 퍼져나가며 각 문화의 옷을 입고 변주되었고, 그 원형의 핵심에는 자연과 영혼의 세계를 넘나들던 샤먼적 존재의 통과 의례가 자리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신화적 사고의 가장 중요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화는 서로를 변형시켜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런 방식에 의해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본(異本)들끼리 만들어 가는 변형의 프로세스는 전체적으로 거대한 군群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신화든 이 거대한 군 속에서 자기 전개를 이루어 가는 것이 신화의 커다란 특징입니다. _ 나카자와 신이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p113
가령 우리나라의 <콩쥐팥쥐>는 계모-자매 갈등 구조에서, <심청전>은 기적적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신데렐라 이야기와 파편적인 유사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 개별 이야기들의 단편적인 모티프를 엮어 '거대한 하나의 원형'을 설명하는 방식은, 어쩌면 저자가 흩어진 증거들을 '유비(Analogy)'적으로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이론을 세운 것은 아닐까. 저자는 유비라는 강력한 도구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인류의 거대한 정신적 네트워크를 그려낸다. 그렇지만 유비는 때로 차이를 무시하고 유사성만을 부각시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위험을 내포하며, 지나친 비약이 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자는 인류의 심연에 숨겨진 원형을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만의 철학을 '창조'한 것일까?
개인적으로 저자는 후자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국가 간 불평등이 그리 심하지 않던 근대 이전 세계 곳곳의 공동체들은 정도의 차이는 다르겠지만, 공통된 사회문제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가족 구조, 신분제도, 경제적 불평등 등.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과 나름의 해결책이 각 지역의 전승 신화라고 한다면, 그 안에 담겨 있는 개별성 대신 전체성만을 바라보고 보편철학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절대성 추구가 아닐까. 각 신화에 아로새겨진 크고 작은 흔적들이야말로 사람들과 공동체의 역사가 들어있는 구체성이며, 문화 DNA이며 밈(Meme)이 아닐까. 쪼갤 수 없는 원자가 개별 이야기라면, 개별 이야기를 쪼개어 본래의 원형을 찾아낸다는 작업 자체가 이미 새로운 창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본문에서 다소 비판적으로 언급한 종교에 대한 부분을 옮겨본다.
신화는 항상 현실의 구체적인 존재나 사실이나 현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신화의 소재는 오감이 파악하는 현실이며, 창조의 재료는 현실의 사회의 구조나 환경이나 자연의 생태입니다. 신화는 그런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곳에서 만들어지고 또한 구전되었습니다. 하지만 종교는 현실의 대응물을 발견할 수 없는 곳에서도 추상적인 사고력이나 환상의 능력으로 관념의 왕국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종교는 아마도 '국가'와 같은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사회의 상위 부분에 만들려고 했던 관념의 운동과 연동해서 생겨난 것일 겁니다. _ 나카자와 신이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p225
본문에서 저자는 추상적이고 관념의 산물인 종교와 비교하여 구체적 인간관계의 산물로 신화를 말한다. 그렇지만, 각 지역에 담긴 신화의 개별성을 자르고 인류의 공통 분모를 추구하는 저자의 노력 역시 다른 의미에서 종교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비록 저자 자신이 스스로 교주가 되겠다는 의도는 없겠지만. 그런 면에서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은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저자의 생각들로 꿰놓은 구슬처럼 다가온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다른 버전인 미크마크 인디언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죽음과 삶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샤먼의 역할을 말한다. 반면, 이 주제는 샤를 페로의 작품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들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원본이 아니라, 이러한 다른 이본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오랜 이야기 안에 담긴 고대인의 생각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 생각이 어떤 이유로 바뀌어왔는가를 되돌아보는 과정에 오히려 신화의 진정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차례다. 저자는 인류의 심연을 '발견'했다기보다, 자신의 철학이라는 면도칼로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해낸 것에 가깝다. 그가 제시하는 죽음과 삶, 샤먼이라는 주제가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정은 인류의 보편적 심연이 아닌 저자 개인의 사상으로 향하는 여행처럼 느껴진다.
원형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유물이 시대의 풍경과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을 때 비로소 위대한 문화유산이 되듯, 신화의 진정한 가치는 각 문화의 옷을 입고 변주된 '이본(異本)' 그 자체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다채로운 이야기 속에 녹아든 구체적인 삶의 흔적과 역사가 바로 신화의 본질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처럼 흥미로운 질문을 통해 독자들을 신화라는 깊고 광활한 숲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신화학 입문서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