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제국
로널드 드워킨 지음, 장영민 옮김 / 아카넷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제국'은 영토나 권한이나 절차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것은 가장 넓은 의미의 정치에 대한 해석적, 성찰적 태도이다. 법의 태도는 해석적 정신을 가지고, 과거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유지하면서 더 나은 미래로의 최선의 길을 보여주는 원리를 법적 실천에 제시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박애의 태도이다. _ 로널드 드워킨, <법의 제국>, p611


 <법의 제국>은 법(law)이란 무엇인가로부터 출발해서, 법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와 지향을 다룬 책이다. 드워킨은 법을 규칙(rule)이라고 정의한 하트의 사상에 대항해, 원리(principle)임을 말한다. 규칙과 원리.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규칙은 적용되거나, 적용되지 않거나의 양자 택일적 성격을 갖는다면, 원리를 규칙과는 달리 원리의 내용대로 이끄는 견인력을 갖는다. 설령,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야할 방향으로 일정 부분 이끄는 영향력,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 드워킨이 바라보는 법(法)이다. 그리고, 힘의 지향은 '단 하나의 정답(One Right Answer)'이다.


 이러한 힘은 법에 대한 '선(先)이해-이해'의 나선형 회전을 통해 작용하게 되며 그로부터 보다 의미있는 인식의 전진으로 나아간다. 시민 공동체를 보다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이러한 작용은 법률가들의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가능하며, 해석학적 순환에는 과거 판례와의 일관성과 현재와의 정당성을 묶는 통합성이 요구되고, 이것은 법의 내용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통합성이 법의 내용적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공정성은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공정성이 정치적 평등을 통해 구현된다면, 통합성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배려해야 한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동등하게 참여하는 공정한 과정을 통해 공동체가 유지되고, 과거의 일관성과 현재의 정당성이 통합성으로 이를 결속시킬 때 법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든든한 울타리, 제국이 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해 구성원들은 '박애(형제애)'의 태도를 견지했을 때, 법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미래의 바람직한 지향점으로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 


 드워킨의 <법의 제국>은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학적 비판을 담은 책이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법이 사회적 관행이라는 법 실증주의와 법관이 선언한 것이라는 법현실주의적 인식 너머에 있는 법의 실체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과거의 판례와 현재의 정당성이 부딪히는 원리의 지원과 원리의 각축 속에서 법은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로 짜여진 직물처럼 나아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은 판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새로운 판례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끊임없는 외양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자리한 보편 가치인 자유와 평등이며, 이를 감싸고 있는 법은 박애의 태도로 정리된다. 독자들은 <법의 제국>을 통해 '단 하나의 정답'이라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선이해-이해의 정반합적 구조, 진보에 대한 근대의 낙관적 태도, '자유-평등-박애'라는 시민 혁명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드워킨의 법은 서양 사상의 구조 그 자체다.


 여기에서, <법의 제국>이 던진 근본적인 질문, '법이란 무엇인가'로 돌아가자. 드워킨의 법의 원리는 과연 모든 시대, 모든 법 체계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틀인가? 드워킨의 구조는 시민 혁명 이후 법전인 <나폴레옹 법전>의 구조를 파악할 때는 분명 유용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근대 이전 시기의 법전인<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다른 문명권인 조선의 <경국대전>에 담긴 정신까지 설명할 수 있는 틀이 될 수 있을까? 근대 이전의 법 체계는 근대적 의미의 자유와 평등을 핵심 원리로 삼지 않았다. 그렇다면 드워킨의 관점에서 이들은 '법의 제국'이라 불릴 수 없을까? 이 물음들은 드워킨의 이론이 가진 근대 서구 중심성이라는 한계를 드러낸다. 나아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법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국제법이 과연 개별 주체인 국가의 독립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박애'의 태도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현실의 복잡성을 설명하기에 드워킨의 이론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물음과 답을 한 권의 책을 읽은 후 찾기는 분명 어렵겠지만, 또 하나의 화두를 안고 다음 책으로 넘어간다. 책을 읽으며 한 단계 나아가는 느낌은 책을 읽는 작은 기쁨이지만, 작은 기쁨 뒤에 주어지는 10개의 과제는 내 자신의 무지를 철저하게 알려준다. 이것을 독서의 좌절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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