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임금철칙설에 따라 생존에 필수적인 적은 금액으로 고정돼 있어. 노동자들이 맨빵만 먹으면서 번식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금액만큼만...... 임금이 너무 내려가면 노동자들이 굶어죽지. 그럼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니까 임금을 올리게 되는 거야. 반대로 임금이 너무 올라가면 넘치는 노동력 때문에 임금을 다시 깎게 되지...... 빈 뱃속이 그렇게 자연적으로 균형을 잡아나가는 거지. 그러니까 노동자들은 굶주림이라는 도형장에 영원히 갇혀 있는 셈인 거야. _ 에밀 졸라, <제르미날1> , p107/214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은 여러 갈등이 중첩된 소설이다. 탄광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대립, 노동 투쟁의 방법에 대한 에티엔과 플뤼샤르의 대립, 카트린을 사이에 둔 에티엔과 샤발의 갈등. 수많은 갈등의 교차 속에서 사람들은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다른 경우에는 슬퍼하면서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점차 잃어간다. 


 양측이 서로 완강하게 버티는 동안 그 폐해가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자본가들도 그 피해가 막심했다. 파업이 하루 더 연장될 때마다 매일 수십만 프랑의 돈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셈이었다. 더이상 가동하지 못하는 기계는 죽은 기계나 다름없었다. 연장과 장비는 녹슬고, 묶여버린 자본은 모래 속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점차 규모가 줄어들었다. _ 에밀 졸라, <제르미날1> , p186/214


 <제르미날>은 에티엔의 등장으로 시작되고 퇴장으로 마무리된다. 에티엔은 어둠 속에서 일자리를 찾아 추위에 떨면서 나타났고, 소설 속에서 여러 풍파를 겪고 다시 혼자가 되어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티엔의 퇴장은 결코 어둡지 않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둠이라면 에티엔이 겪었던 좌절과 실패는 더 깊은 한밤중으로 표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하마터면 쓸쓸했을 그의 퇴장을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바꿔보낸다.


 지평선에서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이 온 들판을 경쾌하게 깨우고 있었다. 금빛 물결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듯 거대한 벌판을 고루 비추었다. 이러한 생명의 온기가 점차 너르게 퍼져나가면서, 대지의 한숨과 새들의 노랫소리, 개울과 숲의 속삭임이 한데 뒤섞인 젊음의 전율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참으로 기분좋은 일이었다. 낡은 세상도 다시 한번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_ 에밀 졸라, <제르미날2> , p166/207


 그렇지만, 과연 실패한 탄광의 파업을 겪고 애인을 잃은 에티엔의 마음마저 밝을 수 있었을까. 과격한 혁명을 추구했던 수바린과도, '전략적 인내'를 강조한 라스뇌르와 대립하면서 마치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국가(國家)를 건설하는 철인(哲人)이자, 노동자의 세상이 만들어진 후 선양(禪讓)하겠다는 꿈을 꿨지만, 그의 이상은 너무도 높은 현실의 한계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카트린을 둘러싼 샤발과의 진정한 '막장' 드라마의 삼각관계를 통해 사선을 넘나든 에트엔임을 고려해 본다면 결코 에티엔의 마음이 희망으로 가득찰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힘들다.


 그는 노동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지켜보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그의 힘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승리의 그날이 도래하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이 소박한 위대함을 지닌 지도자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장면을 그려보기도 했다. 마침내 그가 세상의 주인이 되었을 때, 권력을 홀로 차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민중의 손에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하면서. _ 에밀 졸라, <제르미날1> , p170/214


 "난 집에 노모가 계셔...... 내겐 먹여 살려야 할 어린 자식들이 있어...... 이대로 굶어죽을 순 없잖나......"...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건, 레노르와 앙리가 갱에서 일할 수 있으려면 아직 사오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_ 에밀 졸라, <제르미날2> , p166/20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티엔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무엇때문일까. 현실이라는 높은 벽에 좌절된 이데올로기적 패배, 사랑의 상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티엔이 얻은 것. 여기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온몸 근육 속에서 잠자고 있던 독, 조상 대대로 몸속에 쌓여온 알코올과 헛되이 싸워온 날들. 그러나 지금 그는 굶주림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오래전 부모의 알코올중독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섬뜩함에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교육에 기인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어떤 희열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마침내 충족된 욕망에서 오는 동물적인 기쁨 같은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일종의 자부심, 마침내 승자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_ 에밀 졸라, <제르미날2> , p158/207


 극한 상황에서 샤발을 죽이면서 그가 깨달았던 그의 본성(本性).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처럼 에밀 졸라가 에티엔의 배다른 형 자크 랑티에에게 몰아준 살인 본능과 같은 본성의 발견에 주목한다면,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에티엔의 밝은 퇴장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제르미날>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사상과 감정의 대립이 날카로운 작품이다. 치열한 대립을 통해 인물들과 환경의 한계가 드러나고, 잃어감과 슬픔으로 탄광 파업이라는 사건은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마지막을 마치 5월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의 청량함으로 채우며 더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독자들에게 주려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의 시대로부터 거의 1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보노라면, <제르미날>의 결론은 자신의 숨겨진 본성을 깨달은 에티엔의 작은 승리감 외에는 모두가 잃은 현재 진행형인 게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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