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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 - 전쟁, 기만, 생존
이안 부루마 지음, 박경환.윤영수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7월
평점 :
"이것이 내 인생의 작품이다. 적군의 세계에서 적군의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내 작품을 거짓이나 사기라고 부른다. 그런 이들은 내가 자기 세계를 위협하는 적군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바인레프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가장 명확한 열쇠다. 그는 자치 자신이 예술가인 것처럼 대안 현실 alternative reality을 창조해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예술작품은 실제 세계를 반영하고, 실제 세계에 관해 논평하고, 실제 세계에 대한 표현을 찾는다. 하지만 작품이 실제 세계라고 믿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범주의 오류다. _ 이안 부루마, <부역자 : 전쟁, 기만, 생존>, p13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독일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들을 돕고 한 편에서 섰던 이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속했던 곳을 버리고 새로운 선택을 한 부역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편에서도 긍정적이지 않다. 배신자와 기회주의자라는 부정적인 외부의 시선에 대해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책은 부역자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그려내는 책이다.
기억이란 것은 국가의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마음속에서도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정치동향, 새로운 사실의 발견, 바뀌어가는 취향, 도덕적 행위에 관한 규범의 변화 같은 요소 모두가, 점점 더 멀어져가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 _ 이안 부루마, <부역자 : 전쟁, 기만, 생존>, p13
그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예술가'로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체제가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힘에 압도당한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힘과 한 편이 되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기 처신은 자기 변명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일본의 스파이가 되었거나(가와시마 요시코), 네덜란드 국민들의 강제이주를 막거나(펠릭스 케르스텐),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는 유대인을 구했다(프리드리히 바인레프)고 자신을 변호한다.
책 속 부역자들의 문제는 이들의 기만이, 때로 아마도 거짓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기만이, 결국 자기기만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거짓 속에서 살다보면 흔히 그런 결과를 맞는다.... 독재와 강점 세력에 저항했던 사람들 또한 이름이나 문서나 정체성을 꾸며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이들은 스스로를 기만하지는 않았다. 그늘 속에서 비밀스럽게 살았을지언정 진실 속에서 살았다. 반면 두려움이나 기회주의에 사로잡혀 거짓 속에 사는 사람들은 결국 거짓에 사로잡혀버린다. _ 이안 부루마, <부역자 : 전쟁, 기만, 생존>, p197
저자는 이러한 그들의 변호가 결국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저자의 이 책은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왜곡된 기억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짓말. 한 편에서는 배신자로, 다른 편에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부역자들이 누구보다도 자신의 선택에 충성스러울 수밖에 없던 이유를 저자는 공통점이 없는 세 명을 통해 입체감있게 잘 보여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