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음(陰)이라도 애석한 것이다. 만약에 종일토록 선을 행한다하여도 일생 동안에 역시〔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을 것인데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 시대에 요(遼)를 정벌하면서 사람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수 양제(隋煬帝, 楊廣, 569-618)의모든 군사들이 함락되어 죽었고, 당 태종(太宗, 李世民, 598~649)은 자신이 사졸들보다 앞장섰지만 끝내해결한 바가 없었습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란 안으로 정사를 잘 닦는데 있으니 그러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귀부합니다.

"진(晉, 후진)-한(漢, 후한) 시절의 병란으로 산 영혼들이 시들고 죽어서 거의 다 없어졌는데, 당시에 다시는 태평스러운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짐이 몸소 여러 정사를 살펴보고 만 가지 일들이 면밀하게 정리하며 매번 상천(上天 하늘)이 하사하시어서 이처럼 번성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침내 잘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운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요(遼)의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정사일(5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정삭(朔)을 시행한다고 알리고 포로를 돌려보내 줄 것을 빌었다. 요(遼)가 그들이 대속(代)하고 송환하는 것을 허락하고 숭록경(崇祿卿)인 소술관(蕭述管)·어사대부인 이완(李流)을 파견하여 조서를 싸가지고 이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경술일(29일)에 고려 국왕인 왕치(治, 성종, 960-997, 재위: 981~997)가 요(遼)의 군사가 그들의 경계를침략하였다고 하며 사자를 파견하여 군사를 출병하기를 빌었다. 황제는 북쪽 변경이 비로소 편안해 졌는데 가볍게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고 하여서 그 사자(使者)에게 두터이 사례하고 그를 돌려보내면서 이어 우대하는 조서로 왕치에게 답장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조공은 드디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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