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 전면개정판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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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환공은 남면 南面하여 패업의 완성을 칭하면서 제후들의 군사를 조발해 주왕실에 왕성을 쌓아주고, 강성 絳城에서 진혜공 晉惠公을 복위시켰다. 북악 北岳의 항산 恒山 일대의 제후들 중 감히 신복치 않는 자들이 없게 되었다. 제환공이 마침내 양곡 陽谷에서 제후들을 크게 소집했다. 제환공은 전쟁을 종식시키자 문교 文敎를 추진하면서 제후들을 이끌고 가 주나라 천자를 옹대하는 패업을 이뤘다. _ 좌구명, <국어 國語> <제어 齊語> 中, p238


 좌구명(左丘明, BCE 556 ~ 451)의 <국어 國語>는 춘추(春秋)시대 주(周)나라와 패자(覇者)들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을 그려낸다. 이 시기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주변의 오랑캐들을 물리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치로 한 중원(中原)지역의 역사가 <국어>에서 서술된다.  


 춘추시대 전반기에 처음으로 나타난 제환공과 관중의 패업은 역대 중국정권의 모든 통치를 평가하는 데 결정적인 준거가 되었다(p24)... 이들 춘추시대의 패자들은 제환공에서 월왕 구천에 이르기까지 후대로 내려갈수록 왕업의 색채가 희박한 패업을 이뤘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다만 구천의 경우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무자비한 패업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앞선 패자들과 적잖은 차이가 있다. _ 좌구명, <국어 國語> 들어가는 글 中, p28


 역자 신동준(1956~2019)은 들어가는 글에서 패업의 변천에 대해 언급한다. 존왕양이에 충실했던 초기 패자들인 제 환공(齊 桓公, BCE 720 ? ~643)과 진 문공(晉 文公, BCE 697~628)의 패업과 후대의 월왕 구천(句踐, ? ~ BCE 464)의 패업은 내용면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역자는 이 점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에 서있지만, 책을 읽으며 조금은 다르게 생각된다. 스스로 왕(王)을 칭한 초(楚), 오(吳), 월(越)의 장강 이남의 패자들이 나타나면서 주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무찌르겠다는 이상을 더는 따를 수 없었고, 따를 필요가 없었을 때 '존왕양이' 이념의 유효기간은 끝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당초 우리 월나라의 선군은 본래 주왕실로부터 정식으로 책봉을 받은 제후가 아니었기에 자작도 될 수 없었소. 그래서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동해의 해변에 거처하면서 큰 자라, 악어, 물고기, 자라 등의 원타어별  黿鼉魚鼈을 이웃으로 삼고, 개구리와 두꺼비인 와민 蛙黽과 함께 물가에 살게 된 것이오. 우리는 비록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으나 아직도 중원의 제후들로부터는 금수취급을 받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어찌 그대의 교언선변 巧言善辯을 알아들을 수 있겠소. _ 좌구명, <국어 國語> <월어 越語 하 下> 中, p645


 개인적으로 춘추시대의 패자와 주왕 사이의 관계를 보면서, 800년 샤를마뉴(Charlemagne, 740 ~ 814)의 서로마제국 황제 즉위를 떠올리게 된다. 교황 레오 3세(Leo PP. III, 750 ~ 816)로부터 황제관을 받으며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을 서로 인정했듯, 고대 중국에서 왕실과 패자의 관계는 천명(天命)을 받드는 왕실과 현실적 리더로 패자 사이의 권력의 양분(兩分)으로 보여진다. 구정(九鼎)이 갖는 권위를 바탕으로 중원지역의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주왕실이 가졌던 종교적 권위였다면, 구정의 무게를 묻는 초 장왕(楚 莊王, ? ~ BCE 591)이 패자가 되는 순간 종교적 권위가 패자에게 넘어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 여겨진다.


 군왕이 악기를 만들었을 때 백성들이 모두 이로 인해 안락해야 비로소 조화를 이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종을 만들기 위해 재용을 많이 사용해 민력을 피폐케 만들었습니다. 이에 이를 원망치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소리가 조화를 이뤘다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함께 좋아하면 성공치 못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모두 함께 혐오하면 폐기되지 않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_ 좌구명, <국어 國語> <주어 周語 하 下> 中, p136


 이렇게 역사는 오랑캐들에게 패업을 주면서 춘추시대는 막을 내리고, 힘을 가진 자가 약자를 병합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로 흘러간다. 당대를 살았던 이들은 춘추시대는 최소한의 명분을 갖고 천명을 받들기 위해 노력을 했던 시기였던 것에 비해, 전국시대는 오로지 힘만이 지배하는 강자의 시대로 규정하고, 시대의 역행에 대해 탄식하는 글을 많이 남겼지만, <국어>를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춘추시대가 황하와 양자강 사이의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한 일부 지역의 시대였다면, 어쩌면 전국시대는 그동안 소외받던 강남지역의 철기 문명이 새롭게 부상하는 변화와 혁신이라는 르네상스 시기가 아니었을까. 


 하늘이 월나라에 커다란 화를 내려 오나라에게 월나라 땅을 다스리게 했을 때 오나라는 천의를 어기고 이를 받지 않았소. 지금 우리는 그대들이 저지른 잘못과는 상반되는 방법을 취하려 하오. 그것은 바로 오나라를 멸망시켜 과거에 받았던 수난을 보복하는 것이오. _ 좌구명, <국어 國語> <월어 越語 하 下> 中, p644

 

 비록, 오랑캐 패자라는 새롭게 합류되는 물로 인해 흐르는 강물은 탁해졌을지 모르겠지만, 새로움이 가져온 변화가 전체적으로 중국문명이라는 강물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오랑캐로 배척받던 이들이 새롭게 중심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국시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거름이 되었다면, 춘추시대 주왕실과 패자의 시대의 종언은 시대적 사명을 충분히 마무리한 것이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춘추5패'를 위시한 열국의 맹주가 막강한 무력을 배경으로 제후들에게 위압적으로 군림하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왕실로부터의 공인을 전제한 한 것이었다. 도덕적 권위가 담보되지 않은 힘은 제후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춘추시대가 비록 '패자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열국이 상대적으로 평화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주왕실은 사실상 극도로 미약한 약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통치권위를 보유하고 있었고 열국은 비록 영토의 크기 등에서는 대소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상호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춘추시대의 '5패'가 전국시대의 '7웅'과 근원적인 차이를 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_ 좌구명, <국어 國語> 들어가는 글 中,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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