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일(14일)에 철기도장(鐵騎都將) 이회의(李懷義)·내반도지(內班都知) 조인수(趙仁璲)에게 명령하여 궁궐을 증수하게 하였는데, 이미 완성하고 나니 황제는 침전에 앉아서 여러 문을 활짝 열도록 명령하여 모두 단정하게 관통하며 넓게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마음과 같으니 조금이라도 삐뚤어지고 굽은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모두 이를 볼 것이다."
을미일(15일)에 비서랑(秘書郞)·직사관(直史館)인 관성(管城, 河南省 鄭州市) 사람 주한(周翰)이 말씀을 올렸다. "무릇 명장은 모두 사람 가운데 영웅인데 만약에 흠집을 지적하려고 한다면 누가 누(累)가 없겠습니까? 어느 날 신위(神位)를 제거하고 터럭을 불듯 다른 시대의 잘못을 찾아내서 옛 사람들의 악함을 소매를 떨치며 분노한 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은 마음으로 의혹합니다." 회보하지 않았다.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소(王昭, 925~975)가 사자 시찬(時贊) 등 파견하여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는데, 바다를 건너면서 큰 바람을 만나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90여 명이었으며 시찬은 겨우 죽음을 면하니, 조서를 내려서 그들을 위로하고 가엽게 여겼다.
황제는 일찍이 두의를 불러서 제서(制書)에 초를 잡게 하여, 원문(苑門)에 도착하였는데 두의는 황제가 안책(岸?)하고 발을 벗고 맨발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물러서서 나아가지 않으니 황제가 이 때문에 관대(冠帶)를 갖춘 다음에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두의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창업하시어 전통을 내려 주시는데 의당 예로써 천하를 다스려야 합니다." 황제가 얼굴을 고치고 그에게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가까이 있는 신하를 대하면서 일찍이 관대를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이달에 비로소 철전을 사용하고 한희재를 발탁하여 병부상서·근정전(勤政殿)학사로 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옛날 돈을 감추어 숨겨놓으니 옛날 돈은 더욱 적어지자 상고(商賈)들은 경계 밖으로 나가면서 번번이 철전 10개를 가지고 동전 하나로 바꾸었지만 관부에서는 금지 시킬 수가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그 편리함을 좇았다. 관리들은 녹봉을 늘렸으나 철전으로 이를 겸하게 하니 이로부터 물가가 더욱 비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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