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체제’의 기본은 안전보장과 경제협력, 간단히 말하자면 ‘안보 경제’였다. 원래, 한일교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식민지배 기간에 한일 간에 이전된 경제적 가치의 원상 복귀를 꾀하는 방법으로 청산을 시도한 것이었다. 또 그것에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을 입혀, 그것을 수단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일의 안보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렇듯, 안보와 경제를 우선함으로써 역사 청산은 미흡하게 매듭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일본에서 원재료나 기계, 부품 등의 수입이 늘어났으나, 일본에 대한 공업제품의 수출이 수입과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일 무역 적자는 날로 증대되었다.

일본 정부나 기업은 자국의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국제 분업 체제의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적 높았다.

더욱이 한일의 경제협력이 한일 각자의 정부 여당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강화한다는 역학도 성립되었다. 한일 협력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에 박차가 가해진 것은 결과적으로 정권의 실적을 올려 정통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1970년대의 한일관계를 형용할 때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은 ‘한일 유착’이다. 이것은 부패를 동반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1970년대의 한일관계가 1960년대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긴밀하였는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협력이 쉬운 측면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와 같이 한국이 비민주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한일 협력에 대한 저항을 상당 정도 억제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만한 한일 협력이 가능했다. 또 한일 협력의 성과로 한일 간 국력 격차가 좁혀졌다고 일본이 그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 서로 비대칭적이었던, 바꿔 말하면, 서로 너무도 달랐던 점이, 상호 협력에 따른 손익계산에 관해, 누릴 이익에는 민감했지만 부담할 비용에는 그다지 민감해야 할 필요성을 없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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