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 체제는 1948년 이후로 70년 이상 일관되게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격변했다. 그중 하나가 1970년대 초반, 미중 화해나 중일 국교 정상화 등으로 중국을 둘러싼 국제관계가 크게 변용한 것이다.

미중 화해, 중일 국교 정상화는 한국에 있어서는 ‘내 편’이었던 미일이 갑자기 ‘적’이었던 중국과의 화해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미?한일관계에 동요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북한에 유리하게, 한국에는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인식되었다.

이러한 ‘한미의 불협화음’은 안전보장 면에서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한일의 접근을 재촉하게 되었다. 1970년대의 한국의 방위산업 육성을 포함한 중화학공업화를 둘러싼 한일 협력은 그 상징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원래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으나, 1960년대는 한국의 성급한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우려를 지닌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중화학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는 어려웠다.

1970년대의 한일관계를 형용할 때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은 ‘한일 유착’이다. 이것은 부패를 동반한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1970년대의 한일관계가 1960년대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긴밀하였는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미국, 북한과의 관계 등, 어떤 요인도 한일을 접근시키려는 쪽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미국의 한국 정책 변화는 미국이 빠질 경우 안전보장상의 우려를 한일이 공유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1970년대는 냉전 시기 중, 한일이 가장 접근한 시기였지만, 그것은 정·재계 등 한정된 일부 엘리트 간의 접근에 그쳤고, 정부 간 관계, 경제 관계에만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한일이 비대칭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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