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체제’의 기본은 안전보장과 경제협력, 간단히 말하자면 ‘안보 경제’였다. 원래, 한일교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식민지배 기간에 한일 간에 이전된 경제적 가치의 원상 복귀를 꾀하는 방법으로 청산을 시도한 것이었다. 또 그것에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을 입혀, 그것을 수단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여 한일의 안보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렇듯, 안보와 경제를 우선함으로써 역사 청산은 미흡하게 매듭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경제협력을 축적하여 안보를 확실하게 함으로써 역사를 둘러싼 대립을 해결한다는 낙관적인 기대도 있었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경제 원조가 필요했다. 따라서 원재료의 수입처는 주로 미국이었으며, 1차 생산품의 수출처는 주로 일본이었다. 그러한 무역구조는 국교 정상화 이후 크게 변화했다. 일본에서 원재료를 수입하여 그것을 가공한 뒤 주로 경공업 제품을 만들어, 미국 등에 수출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일본에서 원재료를 수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교 정상화에 따른 청구권 자금의 공여 때문이었다.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일본에서 원재료나 기계, 부품 등의 수입이 늘어났으나, 일본에 대한 공업제품의 수출이 수입과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일 무역 적자는 날로 증대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대일 무역 적자의 증대를 한국에서 일본으로 경제적 가치가 일방적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이의 시정을 요구했다.

일본은 진정으로 한반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의 등신대를 세워놓고, 일본의 좌우 대립을 그대로 한반도에 투영한 셈이었다.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의 좌파 세력은 한국이 아닌 북한 쪽에 조금 더 친근감을 표했다. 정부 자민당 등의 우파 세력은 반대로 한국 쪽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 중간의 정치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 등 과거의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다는 점은 좌우 모두의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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