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자립적 근대화를 일본은 부정했다. 그로부터 1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남북한과 일본 사이에 가로 놓인 역사 문제로서 이러한 경험은 여전히 살아있다.

도쿠가와 막번 체제는 그 후의 메이지明治 일본과 비교해도, 또한 동시대의 조선과 비교해도 현저하게 지방분권적인 체제였다. 사람들에게 ‘나라’란 ‘번’을 의미하는 것으로 에도江戶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은 희박했다. 여러 다이묘大名를 통제하는 막부의 권력은 강대했지만, 각 번의 독립성이 높았다. 그에 비해, 조선은 훨씬 중앙집권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중화 질서에 근거한 조공 시스템에 편입되어있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중국과는 거리를 두고 중화 질서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의 근대화는 아무래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이대로 놔두게 되면 조선은 청나라?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위기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일본의 안전보장 정책으로 귀결하였다.

한반도 상황에서 보면 다른 얘기가 된다. 조선의 근대화를 통한 자립의 가능성을 망쳐버린 장본인이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마치 일본이 없으면 조선이 청나라나 러시아에 지배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스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국의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은 구실이 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은 조선의 자립, 근대화의 기회를 박탈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도의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침략행위이다. 게다가 애초에는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하자는 자세를 취해 놓고, 차츰 그 협력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침략이라는 ‘배신’ 행위를 했다.

통계에 따르면 식민지지배기(1912~1939년)의 국내총생산GDP 연평균 증가율은 광공업, 전기 가스 및 건설업에서 각각 9.4퍼센트, 9.2퍼센트였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 증가율이 더 커지고 1939년에는 각각 13.5퍼센트, 14.5퍼센트를 기록했다. 이것은 1960년대의 성장률과 거의 필적할 만한 수치였다. 다만, 이러한 경제 발전에 따라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그에 비례하여 상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중국 국내 거점을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충칭重慶을 거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한국의 초대와 평화조약에 서명국으로서의 가능성이 한때나마 논의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대일선전’을 포고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