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 어느 사상의 일생
에드먼드 포셋 지음,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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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 자유주의는 크게 네 가지 이념을 기조로 하여 추구되었다. 첫째, 사회의 도덕적/물질적 갈등은 결코 제거될 수 없고, 그저 억제되거나 어쩌면 유익한 방향으로 길들여질 수 있을 뿐임을 받아들인다. 둘째,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견제되지 않는 권력에 반대한다. 셋째, 사회적 병폐는 치유될 수 있고 인간의 삶은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넷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존재이건 간에, 그들의 삶과 계획을 국가와 사회가 법에 기초해 존중한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서문 中


 에드먼드 포셋 (Edmund Fawcett)의 <자유주의 Liberalism>는 갈등, 권력, 진보, 존중이라는 네 가지 기조를 바탕으로 추구된 사상의 연대기다.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자유주의'의 역사가 결국은 네 이념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에 대한 해석의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자유주의가 주도적인 사회사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자유주의, 경제적-자본주의' 사상은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을 지나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에 이르러 한계에 이르렀고, 자유주의는 그대로라면 유럽을 떠도는 하나의 유령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와 손을 잡게 된다. 이후 엑슨(Exxon)과 모빌(Mobil)의 합병과도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최선은 체제(system)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펼쳐진다.


 자유주의(1880~1945)는 민주주의와 화해했다. 그 역사적인 타협으로, 자유민주주의로 알려진 자유주의 관행이 출현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타협은 정치적 선택, 경제적 권력, 윤리적 권위를 수반했다(p43)... 네 가지 지도 이념 - 갈등, 권력에 대한 저항, 진보, 시민적 존중 - 은 자유주의의 익숙한 경쟁적 표어인 "자유", "개인", "권리", "평등"의 근간이자 그것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의 약속은 서구적이거나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좁게 한정되지 않았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45/487


 1880년에 이르러 자유주의자들은 정치, 윤리, 경제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굳건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민주주의와의 타협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맞닥뜨린 대가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협상의 윤곽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만약 소수가 다수와 몫을 나누어야 한다면, 다수는 소수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51/487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보통선거권과 다수에 의한 지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인련의 흐름 중 하나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가 강조하는 정의로운 사회,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주장하는 높은 고용율 유지를 통한 충분한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라면, 


 존 롤스(1921~2002)의 이력은 두 가지 질문을 천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패배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으로 의견이 맞지 않는데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들은 롤스의 <정의론>(1971)을 관통하는 두 개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답으로서 롤스는 "잘 짜인" 혹은 "정의로운" 어떤 사회를 묘사했다. 그것은 바로, 그 사회의 이점을 누림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시민의 평화를 조건으로 가치 있는 삶의 형태에 관한 심오한 의견 불일치를 수용하는 사회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26/487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부가 경제를 부양하고 실업을 저지할 필요가 있을 때 돈을 쓰고 돈을 빌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프리드먼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통화 안정을 제공하고 내버려둬야 한다. 프리드먼이 인정했듯이, 일자리 부족은 1930년대에 치유되어야 할 질병이었다. 그 자신은 루스벨트 정부에서 일하면서 전시 동안의 원천 과세 도입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도 경제 사상도 변했다. 인플레이션이 위협 요소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59/487


 또 다른 하나의 큰 흐름은 최소정부를 강조한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과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iedman, 1912~2006)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론이라 하겠다.(본문에는 이보다 다양한 흐름들이 소개되지만, 거칠게나마 크게 두 줄기로 묶어본다) 지금까지도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그렇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일련의 흐름이 주류가 된 현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974)에서 정의에 대한 롤스의 원칙들이 화해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노직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부를 재분배하려는 시도는 사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정치 시장에서 우파 논객들은 공정한 절차에 대한 롤스의 표면적 관심이 평등한 결과에 대한 평등주의적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노직의 비판을 환기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35/487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일류 경제 이론가이자 통화 역사가이기도 한 프리드먼은 어빙 피셔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통화 관리가 1920년대 후반의 경기 침체를 10년에 걸친 장기 불황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59/487


 개인적으로 자유에 대한 논의는 결국 자유를 '리버티 liberty'로 볼 것인가, 아니면 '프리덤 freedom'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 여겨진다. 그 전에 먼저 freedom을 'free from~'으로 바꿔써보자.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통해 보장한 보통선거권에서처럼 자유 또한 모든 이들에게 이득(gain)을 최대로 추구할 것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손실(loss)를 회피할 수 있어야 하는가. 국가 또는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자유가, 이사야 벌린이 말했듯 자아실현을 위한 적극적 자유 아니면, 생존을 위한 최저한으로부터의 자유인지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해법이 훌륭한 논법에 의해 제시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리버티와 프리덤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와 페이퍼를 통해 정리하도록 하자. 일전에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를 정리했으니, 공정하게 롤스에게도 기회를 줘야겠다... 


 데이비드 해킷 피셔는 <리버티와 프리덤>(2005)에서, '리버티 libety'와 '프리덤 freedom'이라는 이란성 쌍둥이가 미국의 수사적/정치적 상징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탁월하게 파헤쳤다. 피셔에 따르면, "리버티!"라는 슬로건을 파악하고 지배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진지한 운동도 미국에서 오랫동안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설령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도, 일단 경쟁 운동들이 그 운동에 리버티의 적이라는 오명을 씌워버리면 좀체 성공할 수 없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10/487


 미국인의 혼동은 언어나 개념의 혼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으로부터 자유로운"과 "-을 하는 데 자유로운"이 갖는 어휘상의 문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유로움(막힘 없는 강이 자유롭게 흘러갈 때처럼)과 놓여남(개인이 권위에 의해 멈춰지거나 저지되지 않을 때처럼)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리버티"와 "프리덤"으로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하고자 한 만큼, "리버티"와 "프리덤"의 차이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12/487


자유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한참 후퇴해 보통선거권을 인정했고, 다수에 의한 통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다수의 지배가 갖는 한계들에 대한 탐구를 결코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전략적 후퇴의 첫 번째 요소는 인민 주권에 대한 자유주의의 암묵적 합의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국민에 의한 정부는 특히 대의 代議 representation, 정확히 표현하기 articulation, 관료화 bureaucratization, 절연 insulation이라는 제약을 받아야 했다. - P156

자유주의 정당들을 위해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19세기 말에 이르러 대중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약속했다. 반대당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중 정치에 더 능숙한 그 정당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흡수하고 수용했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약속했듯이 민주주의도 자유주의에 양보한 것이었다. 이러한 타협의 자유주의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 P164

벌린이 제시한 극적인 대조에 따르면, 적극적 자유는 우리의 소질을 육성하거나 발현하기 위한, 혹은 벌린의 애매한 문구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적 발전의 자유였다. 소극적 자유는 좀더 단순해 보였다. 그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대한 외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였다. - P313

근대 국가는 문화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근대 국가는 일종의 윤리적-문화적 실체로 여겨질 수도 있고 정치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윤리적 이상과 문화적 애착을 공유하는 사람들, 즉 에토스 ethos로 간주될 수도 있고, 시민들의 조직체인 데모스 demos로 간주될 수도 있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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