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반도체 제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세계화"가 아니라 "대만화"였다. 기술은 확산되지 않았다. 대체 불가능한 한 줌의 기업이 독점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살펴봐도 세계화의 불가피성이란 틀린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미국의 기술 정책은 그 흔한 상투적 어구에 인질로 잡혀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변화는 반도체 업계 리더들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정부의 도움을 원했지만 동시에 중국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금을 낮춰 주거나 규제를 완화해 주는 일이라면 그런 변화는 미국 내에서의 사업을 더 쉽게 만들어 줄 것이므로 반도체 업계로서도 기꺼이 수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 비즈니스 모델에 변화가 오는 것은 원치 않았다.

진짜 논점은 따로 있었다. 중국이 세계의 기술 인프라에서 더 큰 역할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저지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영국의 신호정보 signal intelligence 기관의 장을 역임했던 로버트 해니건
Robert Hannigan은 이렇게 주장했다. "서구가 중국의 기술 발전을 억누를 수 있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대신에, 우리는 중국이 미래에 세계의 기술 강국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위험을 지금부터 관리해야 한다." 많은 유럽인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렇듯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단계마다 요구되는 도구, 소재, 소프트웨어 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것은 모두 한 줌의 회사들이 만들고 있는 터라, 반도체 생산의 급소를 통제하는 일은 훨씬 쉬워졌다. 그 병목 중 다수가 여전히 미국 수중에 있다. 미국이 직접 갖고 있지 못한 병목은 대체로 미국과 가까운 동맹국의 것이다.

물론 중국이 기술적으로 뒤처진 처지에 놓일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더 많은 반도체 산업이 중국으로 향할수록, 중국은 기술 이전을 요구할 만한 지렛대를 손에 넣게 된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수출 제한을 거는 건 점점 더 큰 손실을 불러오게 될 것이며, 중국은 여전히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막대한 인력 풀을 지니고 있다.

반도체 부족의 주요 원인은 공급 측면보다 수요 증가를 살펴보아야 할 일이었다. 새로운 PC, 5G 스마트폰,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등, 결국에는 우리가 연산력을 엄청나게 사용하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전 세계 정치인들이 반도체 공급망의 딜레마를 잘못 진단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알게 된 진정한 공급망 문제란 공급망의 취약성 때문이 아니라 이윤과 권력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었다. 대만은 정부가 제시한 큰 그림과 자금에 힘입어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었고, 그 결과 반도체 산업 전체가 재구성되었다. 동시에 미국은 대중국 반도체 기술 제재를 통해 반도체 산업의 병목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일인지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중국 반도체 산업은 성장했고, 이는 미국이 쥐고 있는 병목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으로 하여금 대만의 방위를 보다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반도체 생산이 대만에 집중되는 것은 세계 경제에 위험 요소가 되고 있으며, "실리콘 방패"가 중국을 막지 못한다면 그 위험은 현실이 될 것이다.

미국의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만의 TSMC가 필요하다. 네덜란드 기업 ASML의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가 없으면 TSMC는 애플의 최신 칩을 만들 수 없다. ASML은 미국의 사이머, 독일의 트럼프와 자이스의 핵심 부품에 의존한다. 이토록 촘촘하고 정교한 글로벌 공급사슬 덕분에 우리는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기술을 영위하며 살 수 있다. 반도체 국수주의는 위험천만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발상이다. 대한민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 외 수많은 반도체 기업 또한 글로벌 공급사슬의 일부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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