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브는 그런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범용 제품’ 제조업을 포기하는 것은 내일의 새로운 산업으로부터 문을 걸어 잠그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로브의 주장이었다. 그는 전기 배터리 산업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로브는 기고문에서 미국은 "30년 전 소비자 가전제품 생산을 중단했을 때 배터리 산업의 선두 자리를 빼앗겼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PC용 배터리도 잃었고, 이제는 전기자동차용 배터리마저 잃을 상황이었다. 2010년의 그로브가 예언했다. "나는 미국 전기 배터리 산업이 과연 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실리콘밸리가 정부에 바라는 건 다른 나라와 무역 협정을 맺어 수출 제한을 풀어주는 등, 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뿐이었다. 워싱턴의 많은 관료가 반도체 산업의 요청을 받아들여 규제를 더 느슨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중국은 SMIC 같은 야심 찬 기업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영향력 있던 외교관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역과 투자가 중국을 국제 사회 속에서 "책임감 있는 일원"이 되게끔 할 것이라는 생각이 워싱턴의 전반적 분위기였다.

소련과 달리 2000년대의 중국은 이미 세계 경제와 단단히 얽혀 있었다. 워싱턴은 수출 규제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고 결론 내렸다. 중국이 다른 나라 기업으로부터 반도체 관련 제품을 구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미국 기업만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의 그 누구도 동맹국에 수출 규제 동참을 요구하며 불화를 일으킬 만한 배짱이 없었다. 미국의 지도자들이 중국 고위층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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