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방법은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 쓰던 검역 방식과 크게 달랐습니다. 검역은 돌림병이 도는 곳에 사람과 교통을 완전히 차단하는 방식입니다. 돌림병이 도는 지역에서 오는 사람과 물건은 빠짐없이 조사해서 40일 동안 격리시킨 다음 별 문제가 없으면 출입을 시켰습니다. 피난이나 검역 모두 돌림병을 막기 위한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피난은 나만 살겠다는 소극적 방법입니다. 검역은 지역 공동체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일이었죠. 또 검역을 하면서 돌림병에 대한 지식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뜻을 모아 계를 만들었습니다. 돈을 내서 약재를 사 오고,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그 약을 쓰는 식으로 운영한 것이죠. 이처럼 계는 비싼 비용을 들여 약국을 차리지 않고도 약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민간에서 약재의 소비가 많아지자 약계는 더욱 발전하여 가게처럼 되었는데 그게 바로 한약방이었습니다. 약계는 1603년에 만들어진 강릉 지역의 약계가 잘 알려져 있고, 이후 24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 의학의 역사에서 최대 사건은 뭘까요? 저는 다시 한 번 서슴지 않고 한의원과 한약방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뿌리내린 것을 꼽겠습니다. 《동의보감》 같은 뛰어난 의서가 있어도 왕족과 양반, 그리고 서울 사람만 혜택을 누린다면, 백성들에게는 ‘그림 속의 떡’이겠죠? 17세기 후반부터 이후 2백여 년 동안 ‘한의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지방에도 의원이 생기고 한약방도 생겨났죠. 한의학이 널리 퍼져서 보통 사람들과 지방 사람들도 이용하게 된 겁니다.

만파식적을 형상화했다는 설은 신라 범종, 더 나아가 그것을 계승한 우리나라 종의 특색을 잘 설명해줍니다. 신라 범종이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는 고유한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범종에 보이는 쌍룡을 한 마리 용(단룡)으로 바꾸고 대나무 모양의 음통을 만드는 기술 전통을 만들어나간 겁니다. 또 단룡과 만파식적의 모양을 갖추면서 좌우로 약간 비대칭이 생기고, 그로 인해 맥놀이 현상이 극대화되었습니다. 음통이 음의 고주파 영역대 소리를 빨리 사라지게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석굴암은 석굴 안에 본존불을 모신, 우리나라에서는 몇 안 되는 유적입니다. 게다가 유일한 인공 석굴로 석굴 안에 반구형으로 된 천장, 다시 말해 돔을 만든 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습니다. 여기에 수학적 비밀까지 담겨 있으니 정말 놀라운 유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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