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의 등장 이후 한국의 과학문명은 문자 전통이 이미 확립된 중국의 문자와 그 문자로 기록된 제반 지식을 습득하여 자신의 문화를 표현해내고, 더 나아가 학술, 문학, 예술,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기존 한국문명의 틀을 넘어 중국을 위주로 한 동아시아문명의 일원으로 자리하면서 비약하게 됩니다.

고대 한국은 규모도 크고 형태도 다양한 중국의 과학기술을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 실정에 맞게 ‘표준화’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고대 한국 과학기술의 압축된 결과물이 일본의 고대 과학문명 건설을 뒷받침해주었지요.

한국과학문명사에서 만나는 과학유산은 언제 가장 많이 만들어졌을까요? 바로 세종이 다스리던 32년간입니다. 이때 과학유산이 가장 많이 나왔을 뿐 아니라 이전 시기에 비해 연구 수준과 성취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단시간에 질적으로 이루어진 획기적 변화를 혁명이라 말한다면, 이때의 비약을 세종 시대의 ‘과학혁명’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19세기에 전통적인 한국과학문명이 이전 시기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에 오르고 가장 널리 시행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국제적 비교의 시각으로 보면, 한·중·일 동아시아 3국 중 가장 뒤처진 모습을 띠었습니다.

‘신성’의 폭발 장면은 《고려사》 기록이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신성은 광도가 평소의 수천 배에서 10만 배 이상까지 일시적으로 증가하면서 폭발하는 별입니다. 옛날에는 일시적으로 나타나거나 움직인다고 해서 객성
客星, 즉 ‘손님 별’이라고 했죠. 《고려사》에는 "객성이 나타났는데 크기가 모과만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한국의 천문학자들이 1073~1074년의 이 기록을 계산한 결과 ‘아르 아쿠아리’라고 알려진 신성임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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