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것은 원인데, 순환의 지속적인 균등함을 방해하는 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원은 나누어질 수 없고 그 자체 중심과 시작과 끝을 이루며 순환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론은 비례 개념을 신의 절대적 정체성에 의해 유도되는 형이상학적 정서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다.

비례를 신의 불가분한 완전성과 연결짓는 것은 복합적이며, 거기에는 모순의 씨앗이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중세 미학이 양의 미학과 질의 미학 사이에서 해결을 요구받고 있는 문제이다.

모든 사물들이 현상계에서 자신들의 기능과 위치의 의미를 소진한다면, 그리고 본질을 통해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물은 부조리하게 되라는 점을 중세 시대는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상징적 해석에는 기본적으로 본질과의 조화 및 본질에 대한 유추가 담겨 있다. 사실 하위징아는 상징적 해석을 본질의 면에서 사고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상징과 상징된 사물은 추상될 수 있고 비교될 수 있다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중세의 상징주의는 그런 식으로 그 세계의 미적 개념들을 표현해 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 상징주의로서 세계의 미 속에서 신의 손을 식별해 내는 철학적 습성에 관련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보편적인 알레고리로서, 이 세계를 신의 예술 작품으로, 즉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도덕적, 알레고리적, 신비적 의미를 가진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다.

판단의 일치를 보게 되는 아름다운 대상 속에는 객관적인 특질이 있지만, 미의 결정적인 요소와 표시는 시각적 감각을 수반하는 즐거운 동의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절로서 많은 근본적인 요점들을 명료하게 만들어 준다. 사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은 둘 다 형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매우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형식은 그것이 어떤 욕구의 대상이 되는 한, 즉 현실화나 형식의 소유를 위한 갈망의 대상이 되는 한, 그 형식이 실재하는 한, 선함을 지닌다. 반면 미는 형식과 지식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보일 때 즐거움을 주는visa placent 사물들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의 시각으로 보면 즐거움이란 완전히 객관적인 사물들 속의 잠재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다. 즐거움이 미를 규정하거나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드러난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이제는 아퀴나스의 미에 대한 세 가지 규준, 즉 완전성, 비례, 명료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실체적인 형상보다는 구체적 실체의 특징으로 여겨질 때에만 완전한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사실 〈비례〉라는 용어의 여러 가지 의미들 속에서 이런 견해의 여러 예증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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