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중국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범위에 걸친 새로운 제도가 수립되어 성장과 번영의 기초를 놓았다. 인상적으로 높은 GDP 성장률과 함께 성공적인 시장 이행이 이루어졌다. 평균 소득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 수억의 중국인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이 과정은 현대 중국의 장기적 전개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었다.

중국은 분명히 마오 시대의 중국을 닮지 않게 되었고, 전통적인 소련 스타일의 공산주의 국가와는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 시장 경제를 가진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와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중국 수수께끼’라고 불리는 것이다. 경제는 재산권의 분명한 보호 없이 호황을 이루었고, 국유기업은 계속 국가 경제의 핵심 영역을 지배했다. 일부 분야에서 점점 증가하는 자유와 국가 통제 이완이 공산당이 국가와 사회를 확고하게 통제한다는 사실과 충돌했다.

1980년대 말 무렵이 되자 흔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시장 자유화와 국가의 계획을 결합한 모델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경제는 과열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사회적 긴장이 정치적 저항을 자극했다.

중심점은 경제성장이었고 두 개의 기본점은 ‘개혁개방’과 덩샤오핑이 1978년에 내세웠던 ‘4가지 기본 원칙’,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의 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었다. 이 기본 원칙들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1989년의 베이징 학생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정치적 변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 저항운동이었다. 학생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만연한 관료 부패 그리고 학문 분야의 경제적 전망 악화 등과 같이 새로 생겨난 사회 문제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기도 했다.

1989년 학생운동 진압의 이와 같은 결과들은 ‘두 전선에서의 강함’(兩手硬)이라는 구호에 요약되어 있는 1989년 이후 핵심적 정치 전략의 두 가지 일반적 성격과 연관되어 있다. 두 전선은 경제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의미하고, 해결책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톈안먼과 1989년은 개혁의 후퇴를 상징하게 되지 않았고, 영구적으로 중국 개혁의 궤적을 변화시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