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로서 티리다테스 3세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첫째는 로마제국과 사산제국 사이에 끼여 두 나라의 정책과 야망에 휘둘린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였다. 티리다테스 3세의 목표는 로마의 지원을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이 사산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계속 아르메니아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특히 312년 이후 기독교?남쪽과 에데사로부터 아르메니아로 서서히 침투하고 있던 기독교가 아니라, 로마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양성되고 인정된 기독교?의 수용은 당연한 결과다.
기독교는 티리다테스 3세가 통치자로서 직면한 두 번째 딜레마도 해결해줄 수 있는 묘안이었다. 그는 집권 후 지방 토착 귀족들의 관할권을 조정하고 보다 효율적인 조세를 위한 대규모 토지조사를 실시하는 등 정치체제를 중앙집권화하고자 노력했다.
『푸라나』는 위대한 가문과 신의 계보를 기록한 책이다. 이 모든 경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다르마’ 개념이다. 다르마는 계속 진화하면서 갖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질서이자, 우주와 사회의 근원이다. 다르마를 추구하는 방법(당연히 각 바르나마다 그 방법이 달랐다) 중 하나는 계급 구분에 도전하지 않는 것으로, 도전은 우주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행위로 경계되었다.
인도 사회에서 불교의 인기는 힌두교 바르나 체제를 위협했다. 특히 평등 이념에 따라 수행에 전념한 초기 불교는 오직 하나의 계급(브라만)만이 공동체를 위한 제식을 수행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는 기존 체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전통은 사회 전체 구성원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자로서 브라만 계급의 전문 지식, 훈련, 활동에 의존하고, 그들을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대우하도록 강제했다.
불교의 중국 유입이 어느 한 시기에 한 곳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2세기와 3세기 중국에는 18개의 외국인 포교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인도인 포교단이 넷, 인도-스키타이인 포교단 넷, 파르티아인 포교단 셋, 소그디아나인 포교단 넷, 그리고 호탄인 포교단이 셋이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 종파가 중국에 동시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진화한 힌두교나 중국의 유교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로마 세계에서 기독교의 형태가 변화했듯이) 고정된 교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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