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의 외부적 압력 외에 군벌의 내부 위기가 중국의 미래를 빼앗고 있었다. 군벌은 중앙 국가로부터 성이나 지방의 지도자들에게 군사 지휘권이 이양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 자율적 군사 지도자들이었다. 청 말부터 점진적으로 시작된 중앙 권력의 분산은 민간 질서의 동요와 지방 사회의 군사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민국 시대에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와서 폭넓은 군사와 폭력의 문화가 자리 잡아 사회를 형성하고 나라를 뒤흔들었다.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는 레닌주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초기 공산주의자 대부분이 원래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적 신조와 그것을 이은 레닌주의적 변형의 관점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구국에 관심이 있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은 뒤이은 전개와 중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의 최종적 형태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 특히 왜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철학적 사상보다 소련 혁명의 실용적 원칙과 조직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진출에 점점 더 위협을 느끼면서 중국의 국가는 경제에서 더 큰 역할을 맡고 좀 더 직접적이고 개입주의적인 간섭을 하려고 계획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마오 시대 중국의 특징이 될 계획경제’의 시작을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자본가들은 사회나 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했고, 장제스 치하의 당은 반자본주의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장제스는 그의 경력 전체에서 중국 도시 지역의 은행가와 상인들의 다양한 조직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1928년의 중국 재통일은 현실보다는 희망이었다. 많은 지역이 (변경지역의 군벌이 통제하는 곳들과 같이)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거나 (조약항이나 공산당이 도망가서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은닉처를 만든 반란 지역과 같이) 국민당이 직접 통제하지 못했다.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발전이 조약항과 공산당 지역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외국인들이 관리하던 조약항에서는 도시적이고 코즈모폴리턴적인 문화와 현대적 공업이 역동적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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