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점점 더 ‘국치’國恥와 동일시되었고, 젊고 새로운 엘리트들은 여기에 대해 혁명과 ‘구국’救國을 요구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고대의 위엄에 대한 회상과 중국의 퇴보에 대한 분노가 결합되어 중국의 혁명적 민족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1900년 무렵 시작된 이러한 전개는 청조의 빠른 종말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공화국의 구조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민족주의는 민족을 정치적 공동체 혹은 ‘상상된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상상의 요소들은 공통의 역사, (방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영토에 대한 권리, 민족성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공통의 역사적 목적telos 등으로 구성된다. 혁명적 민족주의는 공통 유산의 독특하고 구속력 있는 측면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고 배타적이었다.

혁명이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혁명이라는 말이 서구의 혁명 개념에 좀 더 어울리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세기의 남은 기간에 이 폭넓고 더욱 급진적으로 된 개념이 사상가들과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 용어는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에서처럼) 왕조 체제의 폭력적 전복과 연관되었고, 또한 그와 함께 인민과 국가의 사회경제적, 심지어 지적 상황의 총체적 전환과 연결되었다. 현대 시기에 혁명과 관련된 용어들이 빠르게 다양화되었다.

전반적으로 개혁으로 고취된 민족주의가 빠르게 청 국가의 통제를 벗어났고, 신문과 혁명적 집단들에서 인종주의적·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융합되었다. 이 세대 전체의 급진화는 신정 개혁의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결과로 볼 수 있다. 대담한 제도적 혁신은 너무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국을 구하는 데 실패했지만, 새로운 중국을 형성시켰다.

패러다임의 명백한 전환을 보여준 5·4운동은 분명한 단절이자 중국의 전통에서 현대성으로 전환하는 데 대한 널리 퍼진 연속성 이론에 반대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5·4운동은 식민지 세계의 더 일반적 흐름을 따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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