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위기의 원인이 외부와 내부 모두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부분적으로는 내부적으로 일어난 문제들, 특히 간언의 실천을 포함한 올바른 정치적 규범과 고대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탓했다.

국가 세입의 상당한 증가가 꼭 중앙정부의 재정 상황을 개선하지는 않았다. 상업세와 이금은 1860년대 이후 본질적으로 지방 재정이 되었고, 이는 정치적 탈중앙화와 함께 이루어진 지속적인 재정적 탈중앙화 과정의 일부였다.

청 부흥의 가장 큰 제약은 국방 공업, 철도 건설 같은 다른 현대화 계획을 위한 충분한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의 부재였다. 민간 영역은 투자하기를 주저했고, 정부는 세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중국의 정부 세입 부족은 청 정부가 폭넓은 공업화의 달성과 경제 현대화를 진전하는 데 실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중국 경제의 측면에서 1895년 이후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제활동의 폭발과 극적 성장 국면의 시기였다. 일본에 그리고 최혜국 조항으로 다른 모든 외국인에게도 공장을 설립할 권리를 인정했던 1895년 조약의 조항들이 뚜렷한 영향을 미쳐 공업과 광업 사업에 대한 해외투자의 빠른 팽창으로 이어졌고, 마찬가지로 중요한 결과로 그들과 경쟁하는 중국 민간 기업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패배한 전쟁들은 두 가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중국에 위험이 닥쳤기 때문에 개혁을 위한 요구와 제안이 더 긴급하고 급진적이 되었다. 중국에 민족주의가 나타나서 강력한 정치적 요소가 된 것이 이 시기였다. 둘째, 전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심각한 좌절로 통치 엘리트들은 자강운동이 실패했으며 중국은 그 운동을 재설정하고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청의 경제·사회·재정 정책의 핵심 문제는 정치적 중심이 권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을 주저하는 것이었다. 인구 증가, 1인당 세입의 정체와 감소, 세계적 경쟁이라는 상황에서 중국은 제도적 고갈로 무력해졌다. 제도 변화와 혁신의 부재는 새로운 행정적 계획을 실행하거나 전국적 비상 상황을 다루고자 자원을 동원하는 정치 중심의 능력을 제약했다.

근본적으로, 중국은 국가가 너무 오랫동안 너무 작고, 너무 저비용으로, 너무 약한 채 있었기 때문에 잘못 통치되었다. 중국의 재정적·행정적 쇠퇴는 도광 불황 때 시작되어 19세기 내내 악화되었다. 18세기 중반의 전성기와 비교해 볼 때, 청은 훨씬 더 지불 능력이 없었으며, 부패하고, 비효율적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혁이 제국을 지배하던 정치적·경제적 지도 집단들의 지위, 소득, 미래의 전망 등을 위협할 때마다 결합력을 제공했던 같은 회복력이 제도적 개혁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단기적으로 회복력은 위기 동안 청 제국의 영토를 온전히 보존시켰다. 그러나 필요한 변화를 지연시킨 것은 격동의 20세기의 급진화와 갈등에 더해진 장기적 비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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