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주주의 탄생의 역사에 내재된 취약성과 불확실성 안에 오히려 더 큰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고대 기록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는 일단 그 안에 포함된 모순과 은폐, 재해석을 간파하고 나면 민주주의는 그 착상과 발전이 확실히 보장되었던 적도, 개인적 욕망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도 없으며, 주요 인물들과 역사가들, 그리고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160년대에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명망 높은 스키피오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당대의 역사를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가 압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그 주요 요인으로 로마의 군사조직과 공화정체를 꼽았다. 폴리비오스는 그리스인이었지만 처음부터 아테네의 (이제 기울어가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더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로마가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한 후에도 계속해서 아테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갔다는 점이다. 공화국 수립 직후 로마 대중과 리더들이 다수의 권리와 소수의 권력 간의 균형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격동의 반세기 동안, 로마의 입법자들은 아테네에 체류하며 그곳의 법률 제도와 헌법?특히 로마인 자신들과 비슷한 딜레마를 겪었다고 여겼던 솔론의 개혁?을 연구하여 로마에 도입했다.

폴리비오스에게 12표법 도입은 반세기 전 왕정 타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로마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28 그 이유는 무엇일까? 12표법은 폴리비오스가 통치 모델의 전형이라 여긴 기틀을 제공했다. 즉 12표법은 군주(집정관), 귀족(원로원), 민주주의(켄투리아회와 평민회)적 측면을 모두 가지면서, 동시에 사회 각 집단의 권리와 책임을 법으로 규정했다.

로마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리고 기원전 449년 이후 수세기 동안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 전 계층이 체제를 비판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쪽이 더 혜택이 크다고 믿게 만든 정교한 견제와 균형 체제였다. 폴리비오스의 눈에 로마는 "수많은 투쟁과 소요를 극복"하고 마침내 콩코르디아 오르디눔(계급의 화합)을 이루었다. 폴리비오스가 글을 쓸 무렵에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로마가 더 이상 아테네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가 투표권을 가진 듯 보이지만 사실상 모든 권력은 국가 지도층이 보유하도록 계급 차별이 도입되었다." 이 체제는 정치적·사회적 현실만큼이나 군사적 현실도 반영했다. 전투에서의 승리, 곧 로마의 성공적인 방어는 기병대인 에퀴테스 계급과 그들이 보유한 말과 무기가 제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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