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가는 깊어가는 환경 위기와 싸우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방을 유지하고, 창고를 관리하고, 위태로운 자연환경에 있는 정착지들을 지원하는 데에 점점 더 많은 노력과 자원이 필요했다. 세계적 기후 변동 때문에 기상 패턴은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게 되었다. 홍수와 기아는 점점 늘어나서 무서울 정도의 빈도로 일어났다. 이것은 악화되는 환경 문제의 지표일 뿐만 아니라 제국 체제의 말기에 나타나는 국가 능력 약화의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환경적 어려움은 환경 문제인 동시에 제도 문제였다.
당국에 박해받는 종파가 공개적 반란의 길을 선택했고 종파 바깥에서 만주 통치를 혐오하면서 스스로 국가와 갈등하게 된 많은 추종자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태평천국 반란의 첫 등장은 백련교 반란의 시작과 유사했다. 그러나 홍수전과 그 부하들이 달랐던 점은 기독교 신앙뿐 아니라 새로운 경쟁국가를 만들어내려는 끝없는 야망이었다.
태평천국의 사회적·문화적 계획들은 대부분 지방 엘리트들을 소외시켰고, 이들은 1850년대 말에 태평천국을 패배시키려는 싸움에서 청조와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기독교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서구인 대부분은 이 반란을 질서에 대한 위협이자 신성모독으로 보았다. 서구 열강들에 태평천국 반란은 중국에서 외국 이익의 핵심에 있던 무역의 확대를 막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해외 국가와 기업은 제국 군대가 태평천국과 싸우는 것을 기꺼이 도왔다.
아마도 청조에 훨씬 더 위험했던 것은 만주에 반대하는 정서가 성장한 것이었을 것이다. 많은 반란자가 주장했듯이 만주 통치자들이 천명을 잃었고 새로운 중국인 지도자들이 등장하려 한다는 것이 점점 더 엘리트들의 관점뿐 아니라 대중의 인식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많은 불만 집단이 대담하게 공개적 반란을 선택하게 했는데, 이는 1830년대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경로였다. 따라서 반란자들은 만주 지배자들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군사화를 진전시키고, 지방 엘리트들이 새로운 생존 전략을 취하도록 자극하고, 해외 열강들의 개입을 늘림으로써 계속 청조를 약화했다.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세기 중반의 봉기들은 1911년에 왕조 몰락을 촉발했던 청의 통제력 침식과 반만 민족주의의 성장을 가속화했다.
작은 땅을 경작해서 나오는 수확물에만 의지하는 가정생산으로는 수입을 얻을 수 없는 데다 점점 더 커지는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던 대부분 농민은 평범한 생활수준도 유지할 수 없었다. 중국의 전통적 시장 네트워크의 붕괴는 해안 지역은 더 부유해지고 내륙 지역과 고립된 지역은 더 빈곤하고 낙후하게 되는 장기적 상황을 가져왔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더욱 극심해졌다. 농촌의 농업과 농민 수공업에 기초를 둔 국내 경제가 해체되면서 중국의 전통적 경제구조는 점차 변형되었다.
이 무렵에 중국의 인구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수준인 4억 명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확장이 인구 증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1인당 경작 면적은 18세기 후반에 빠르게 감소했다. 1인당 경작 면적은 19세기 전반에 위태로울 정도로 낮은 지점에 도달했고, 확실히 농민들의 비극을 가져온 한 원인이자 19세기 위기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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