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과 청동기 명문의 마지막 부분은 살아 있는 자의 기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언어적인 유사성이 발생한다. 우리가 살펴본 이런 취지의 글은 혼령들이 후손에게 전하는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이 주목할 만한 언어상의 일치에서 우리는 청동기의 명문과 <시경>의 초기 시가에서 의례적인 언어가 포함되어 있고, 일상생활에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대화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 P72
관중, 손자, 공자, 묵자, 장자, 맹자, 숫자 등의 사상가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후대의 어떤 사상도 이들처럼 심오한 사상을 지닌 다양한 경향을 낳지 못하였다. 거의 모든 그럴듯한 주장들은 옹호자를 찾아냈으며, 그들은 모두 논리정연하였다. 묵자가 논리를 활용한 반면, <도덕경>의 다수 저자들의 목소리는 신비로운 시로읊어졌다. 이들 사상가들의 주장은 국가에 대한 봉사, 인간의 본성, 혼령의 존재, 음악의 장점 등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던 이상적인 성왕(聖王)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다. - P122
장안에 거주하건 투루판에 거주하건 제국의 주민들은 외구그이 영향에 대단히 개방적이던 중국적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도에서 수입된 종교를 진지하고 열렬히 신봉하였다. 수와 당의 황제들은 불교를 후원하였고, 측천무후처럼 불교를 이용하여 통치를 정당화하였다... 당제국의 시민들은 외국인과 교역하였으며, 또한 외국인과결혼하고 그들의 관습을 받아들였다. 당대 사람들은 외국의 예술, 음악, 유행으로 가득 찬 문화적 융합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율령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에서 살았다. - P265
왕조의 수명은 짧았지만, 여진은 중국사에 중대한 돌파구를 제공하였다. 여진의 통치하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중국인 학자들은 비한족 통치자에게서 관직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중국 문화의 대의(大義)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하였다. 한족 군사의 숫자가 금나라 군대에서 여진족을 능가하였고, 남송의 장군은 1206년 화북의 한족들이금나라에 대해 봉기하지 않았을 때 몹시 실망하였다. 한족 출신의 문신관료들은 여진에게 중국식 통치방식과 중국을 모델로 한 관료제의 구상을 도와줌으로써 협력하였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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