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노르드인들이 빈란드를 버리고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가는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원인으로 꼽는다. 또한 노르드인들이 목재 말고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넌지시 운을 띄웠다.

1000년 무렵에 일어난 다른 만남들과 비교할 때 노르드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조우가 장기적으로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약간의 대화, 이따금 진행된 물물교환, 아마도 사고로 일어났을 몇 차례의 육탄전. 노르드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에 일어난 접촉은 이 정도였다.

노르드인의 아메리카 탐험은 세계화와 관련된 그 밖의 다른 정보도 제공해 준다. 아메리카 대륙의 교역이 그들의 탐험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말하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은 노르드인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장거리 교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르드인의 탐험이 가장 중요했다. 이미 존재했던 대서양 양쪽의 교역망이 그 탐험으로 연결되어 세계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노르드인들이 만일 유카탄반도에 닿았다면 그 경로는 해상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가능성은 훨씬 낮지만,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되어 유카탄반도에 도보로 끌려왔을 수도 있다. 그럼 이제부터는 바이킹 페니가 발견된 메인주의 고다드 포인트에서 육로를 통해 치첸이트사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한번 조사해 보기로 하자. 메인주에서 멕시코로 가는 데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경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북남으로 흐르는 미시시피 계곡을 통과하는 길이다. 물론 그것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유골이든 물건이든, 그 여정을 끝까지 마쳤음을 보여 주는 증거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북아메리카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확장된 경로 네트워크가 1000년 무렵에 형성되었고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물건과 사람, 정보가 그 경로들을 따라 이동했다고 확신한다.

콜럼버스는 카누의 중요성을 즉각 파악했다. 배 안에 "그 고장의 모든 산물이 실려 있다는 것을 (……) 한 순간에" 알아차린 것이다. 콜럼버스는 수놓아지고 채색된 면 의류, 목검, (아마도 흑요석이었을) "강철처럼 절개된 부싯돌" 칼, 구리 방울 등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롭고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물건들"을 마야인들에게서 빼앗았다.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은 스페인인들이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정교한 교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치첸이트사가 중심이 되었던 그 교역망은 1000년에는 북쪽의 차코 캐니언과 카호키아로 뻗어 나가고, 남쪽의 콜롬비아까지 도달했다. 그 교역망은 유연하기도 했다. 1000년 이후의 치첸이트사나 1050년 이후의 카호키아처럼, 새롭게 발전하는 도시들이 생겨나면 주민들이 새로운 통로를 개통하거나 새로운 중심지와 연결되는 해로를 개척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은 기독교계를 형성한 핵심적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영역에는 프랑스의 두 배 크기인 40만 제곱마일(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인구 5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1세가 기독교로 개종했으니, 동유럽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로마도 아니고 메카도 아닌, 비잔티움 쪽에 서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도 이제 더는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보유하지 않았다. 고향에 머물러 지내는 사람까지도 포함해, 그들은 이제 그들의 출생지를 종교 블록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규모가 큰 집단 사람들과 자기들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세계화의 핵심 단계로 진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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