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오쇼 라즈니쉬 지음 / 기원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명상이란 평온과 '공(空)'을 의미합니다. 그 공(空)은 그곳에 항상 있는데, 생각의 흐름에 따라 모습이 감춰지고 생각이 멈추면 그것도 모습을 나타냅니다. 마음은 때로 매우 불안정한 듯이 보이는 반면 또한 쉽게 침착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초월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관조(觀照)'입니다. 인간은 한 사람의 입회인, 즉 자신에 대한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을 지켜봐야만 합니다. 그 관조 상태가 찾아든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22

오쇼(Bhagwan Shree Rajneesh, 1931 ~ 1990)의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는 명상(冥想), 관조(觀照), 공(空)이 본문 전체에서 반복된다.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는 끊임없이 주관적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를 행한다는 것. 그것은 자아(自我)의 소멸이자, 신(神)과의 합일(合一)이기도 하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그것은 영원한 것과 하나가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의 흐름을 지켜보십시오. 오로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저절로 생각을 소멸시켜 갑니다. 관조(觀照)의 깨우침이 마음속의 잡음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31

오쇼가 말하는 자유(自由)는 '~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이라는 상대적 자유가 아니다. 과거로부터 얻어지는 현실태(現實態)와 미래에 대한 가능태(可能態)가 인간 프시케(Psyche)를 구성한다면, 저자 오쇼는 오직 현재로부터 얻어진 깨달음, 진리(眞理)는 프시케, 자아와 함께 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명상을 통해 과거/미래와 현재, 주관과 객관, 우연과 필연, 불멸과 필멸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인식의 대상과 인식자가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 안의 신성(神性)을 밝힐 수 있다.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는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다가오지만, 잠시 멈칫하는 대목도 있다. 바로 의지(意志)와 관련된 부분이다. 의지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앞선 구절과, 의지는 오히려 길을 막는 장벽이라는 충돌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앞선 의지를 명상에 의해 자신의 아집을 멸(滅)하고 새롭게 피어난 연꽃과 같은 의지로, 마치 무위(無爲)를 행하는 위(爲)와 같은 의지로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까. 

 인간은 점점 모든 변화의 뒤를 변모시키지 않는 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속에 생겨난 그 목적의식을 환영하고 싶습니다. 그런 강건한 의지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좀 더 깊은 우리의 힘이 그것에 의해 불러일으켜지고, 활기찬 에너지가 생성될 때 거기에서 음악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39

 무의식중에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 의식적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성스러운 것 중에 당신의 의지로 인해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의지는 길을 가로막는 최악의 장벽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174

 무위를 행하는 위, 공에 머물리 위한 집중 이나 노력 마저도 피안(彼岸)에 이르면 또 다시 버려야할 뗏목이 된다면, 결국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아를 시공간안에서 끊어가고 줄여가지만,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탄탈로스의 형벌처럼 영원한 굴레 속에 갇혀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에서의 찰나를 보십시오. 공간에서의 원자를 보십시오. 그 '시간 속의 찰나'에서 시간은 존재를 정지하고, '공간 속의 원자'에서 공간은 존재를 끊습니다. 그곳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고 지금 이곳이 있을 뿐입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91 

오쇼 라즈니쉬는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에서 궁극적으로 명상을 통해 신의 뜻에 따라 가는 순응의 삶을 말한다. 종교가 있는 이들에게는 신의 길이, 없는 이들에게는 자연의 법칙이 되는 이 길에 순응하는 삶을 통해 절대적 자유를 얻는 길을 가자는 오쇼의 주장은 간단하지만, 삶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마치 양궁 경기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활을 쏴 날리고 나중에 그곳에 가서 과녁을 그려넣자는 오쇼의 말. 자칫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는 현실을 모르는 어느 수도자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지향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도 최소한 어떤 국면에서는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다 객관적으로 사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보기'에 대한 오쇼의 말은 우리 가 자신을 객관화하는데 좋은 조언이 되리라 생각한다...

명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즐기도록 하십시오. 완벽하게 고요한 수동성의 경지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세계와의 조화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고의 모든 형태는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돌과 함께 자아도 점차 사라져 갈 것입니다(p121)... 자아는 과거 속에서만, 또는 과거의 투영뿐인 미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순간에서 순간으로의 알아차림이 무아(無我)라는 것에 연결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아는 현재 속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현재의 울타리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133

기도로 가득 찬 마음에서의 비움이야말로 신과 연결되는 문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풀어 놓으십시오. 마치 강물에 띄워진 작은 배처럼......(p49)... 자신을 신 속에 빠뜨리는 자야말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다시는 목표를 갖지 마십시오. 목표를 지닌 인간은 헤쳐 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든 닿은 곳, 그곳이 당신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_ 오쇼 라즈니쉬, <평온, 그 영원한 안식처>,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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