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고약한 미신에서 해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고약한 불공정에서도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보통 미신과 불공정은 종교와 세속 권력이 손을 잡고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 둘은 실제로도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혁명, 종교에 대한 불신, 그리고 과학의 부흥이 같은 시기에 연달아서 일어나고는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은 과학을 성장시키기 위한 필요 조건일 뿐 그것만으로는 충분 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진화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바로 우리의 유전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진화의 증거이기도 한 그 DNA를 소유한 사람들이 여전히 진화론을 놓고 싸우고 있다. 학교에서, 법정에서, 교과서 출판사에서, 그리고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는 윤리적 허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관한 물음을 둘러싸고 진화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어린이들에게는 책에 있는 과학적 사실을 읽어 주는 것보다 실험을 실제로 체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양초의 불꽃이 생기는 것은 양초를 이루는 파라핀이 산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유리병 같은 투명한 용기 안에 양초를 넣고 불을 붙이면 아이들은 훨씬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연소를 통해 생긴 이산화탄소가 심지를 둘러싸 산소의 접근을 차단하면 불꽃이 깜빡이다가 금방 꺼진다. 이것을 직접 관찰하기만 해도 산화와 연소의 과정을 훨씬 실감 나게 배울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결은 오로지 한 가지이다. 일반 청중에게 이야기할 때 동료 과학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뜻하는 바를 즉각적으로 정확하게 전달하게끔 해 주는 어휘들이 있다. 전문 용어, 학술 용어라고 불리는 게 그것이다. 과학자들이야 직업상 그런 어휘들을 쓰는 게 일상이겠지만, 일반 청중에게는 과학을 신비화할 뿐이다. 가능한 한 가장 쉬운 어휘를 써야 한다.

가난, 무지, 희망 없음, 그리고 자기 비하라는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악순환하는 영구 기관을 만들었고 몇 세대에 걸쳐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으스러뜨리고 있다. 게다가 거기서 나오는 피해는 모든 사람이 나눠 가져야 한다. 읽기 능력의 결여야말로 그 영구 기관의 핵심 부품인 셈이다. 이 영구 기관의 제물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모욕을 당하고 비참한 상황을 맛보고 있다.

물론 과학의 응용은 위험을 동반한다. 그리고 내가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했던 것처럼 인류 역사에 나타난(석기의 발명과 불의 사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기술적 진보는 예외 없이 모두 윤리적 이중성을 띤다. 진보된 기술을 무식하거나 사악한 자들이 위험한 목적에 악용할 수도 있고 현명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인류의 안녕을 위해 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보는 방송 프로들은 언제나 그 이중성의 오로지 한 측면만 드러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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