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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ㅣ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지음, 김주식 옮김 / 책세상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목적은 해군 관련 사건들에 대한 연대기를 단순히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반적인 역사에서 어떤 해군 관련 사건을 그 사건의 인과관계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전략적이거나 전술적인 토론도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은 일반적인 전쟁 결과와 국가 번영에 미친 해양력의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다. _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 p328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Alfred Thayer Mahan, 1840 ~ 1914)의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은 해양력의 관점에서 바라본 유럽/미국사이며, 이는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헤게모니(Hegemony)가 교체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자연스럽게 마한은 제해권을 통해 자본주의(capitalism), 제국주의(Imperialism) 주도권 교체를 설명한다.
역사 속에서 헤게모니 경쟁의 최종 승자는 당연히 영국이다. 그리고, 영국에 헤게모니를 넘겨주기 전까지 강력한 해운제국은 네덜란드였다. 그렇다면, 네덜란드가 영국에 뒤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모든 자원을 해운에 쏟을 수 있었던 영국과는 달리 대륙의 일부로서 주변 강대국 - 프랑스, 스페인 - 과 끊임없는 전쟁을 기울여야 했던 지정학적 요인이 가장 큰 차이였으며, 결정적으로 영국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으로 네덜란드 오라녜 공 빌럼이 윌리엄 3세(William III, 1652 ~ 1702)가 되면서 네덜란드의 물적/인적 자원이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패권은 넘어가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위치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영국과 프랑스 중의 한 나라와 항상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전쟁은 네덜란드의 재정을 고갈시켰으며, 해군을 파괴했고, 무역과 제조업과 상업에서의 급속한 쇠퇴를 초래했다. _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 p273
오라녜 공은 영국의 왕위를 차지하기를 바랐는데, 그것은 평범한 개인적인 명성의 확장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세력을 영구히 억제하고자 하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최대한으로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영국 원정을 위해서 네덜란드 연방으로부터 함정, 군자금, 그리고 병사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윌리엄의 요구에 대해 망설였다. 왜냐하면 프랑스 국왕이 제임스를 자신의 동맹자로 선언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윌리엄의 영국 원정은 결국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될 것잉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인들의 행동은 결국 루이에 의해 결정되었다. _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 p285
그렇다면, 프랑스가 패권 경쟁에서 밀린 이유는 무엇인가? 마한에 의하면 그것은 자원의 효율적 활용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전 시기까지 재상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 ~ 1683)와 성공적인 국가 운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 1638 ~ 1715)가 대륙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프랑스의 해운력은 감퇴되었고, 이는 헤게모니 쟁탈전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는 점이 저자의 설명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세계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을 유추할 수 있다.
루이 14세는 군함을 제외한 프랑스의 해상 이익에 계속해서 등을 돌렸다. 그는 평화적인 해운과 산업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군함도 거의 쓸모가 없거나 불확실한 존재가 될 것임을 알지 못했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강력한 육군 건설과 영토확장을 통해 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프랑스를 해상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간접적으로는 네덜란드의 세력을 해상에서 궁지에 빠지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_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 p132
프랑스는 영국과 거의 비슷했으며 다른 적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분명히 부와 신용 면에서의 차이였다. 프랑스는 단독으로 많은 적을 상대했지만, 그 적들은 영국의 보조금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_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 p356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에서 저자는 해군과 육군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전시가 아닌 평시에서 활용에서 발견한다. 육군은 전시외에는 활용이 불가한 반면, 해군은 다르다. 전시에는 군함으로, 평시에는 무역선으로 선박의 전용이 가능하며 적지않은 경우 해적선으로도 이용가능하다는 점에서 육군은 비용(費用)인 반면, 해군은 자산(資産)으로 설명된다. 결국, 한정된 국부를 어디에 효율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가에 따라 국력이 결정되었다는 설명을 마한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제시한다.
해상을 왕래하는 선박은 돌아갈 항구를 갖고 있어야 하고, 가능한 한 먼 곳까지 자국의 보호를 받으며 항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전시에는 무장함선이 보호 임무를 수행한다.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한 나라가 해군을 단순히 군대기구의 일부로만 유지시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해군의 필요성은 상선이 존재하면서부터 시작되고 또 그것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한정된 범위로 이야기할 수 있다. _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 p73
이처럼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은 해양력의 역사를 보여주지만,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와 헤게모니의 역사도 함께 보여준다. 이는 자본주의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지된 제국주의임을 반증한다. 본문에서는 해양 전술과 관련된 내용도 상세히 다루어지지만, 그러한 전술적인 면보다 바다를 중심으로 제국을 구축했던 제국주의 국가의 전략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시각으로 보는 편이 보다 유용한 독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바다에 접해 있는 국가의 정책뿐만 아니라 역사의 중요한 열쇠는 교역을 요구하는 생산, 교역품들을 운반하는 수단으로서 해운, 그리고 해운 활동을 도와주고 확대해주는 동시에 안전한 거점을 증가시켜서 해운을 보호해주는 식민지, 바로 이 세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정책은 그 시대의 사상 그리고 통치자의 성격과 통찰력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변해왔다. _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1> , p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