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과 사회당 양당을 비롯한 일본의 정치 시스템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던 것은 신 중간층을 중심으로 한 변덕스러운 유권자들뿐만 아니라 일본을 둘러싼 국제 환경의 변화도 있었다. 미소 양대 구조가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여전히 ‘신세계 질서’는 명확해지지 않았고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 걸친 국제 연계의 새로운 모습이 모색되고 있었다.

한편 오자와의 신우파 전환 비전을 정리한 것이 『일본개조계획』이다. 일본을 ‘보통 국가’로 개조하겠다는 그 발상은 그야말로 걸프전 당시의 ‘국제공헌론’을 시작으로 군사 측면으로 바뀌기 시작한 국제협조주의의 하나의 도달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 경제의 신자유주의화를 강하게 주창한 것이었다. 실제 집필에는 기타오카 신이치(도쿄대학 교수, 역사학자-역자 주), 다케나카 헤이조(게이오대학 교수, 경제학자-역자 주), 이오 준(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 정치학자-역자 주) 등 당시 소장파 학자로 주가를 올리던 학자들이 담당했고 오자와 개인의 영고성쇠를 뛰어넘어 고이즈미나 아베에 이를 때까지 이후의 신우파 전환 프로세스를 결정적으로 규정해갔다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서는 전후 수상으로서 최초로 1985년 8월 15일 공식적으로 참배했지만, 중국의 반발을 산 결과 ‘우리 일본이 평화 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바야흐로 막중한 책무를 짊어져야 할 입장에 있음을 고려하면 국제 관계를 중시하고 근린 국가들의 국민감정에도 적절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1986년 8월 14일 ‘내각총리대신 그 외 국무대신에 의한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에 관한 고토다 내각관방장관 담화’)고 하며 이후의 참배를 중지했다. 사실 이러한 논법은 이 시기의 국제협조주의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 하나로는 오자와 등이 실현시킨 선거 제도 개혁에 의한 소선거구제의 도입이다. 종래의 중선거구제에서는 서로 다른 파벌에서 추대된 자민당의 복수 후보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으로서의 구심력이 약했고 정당 간 정책 위주가 아니라 개개의 정치가에 의한 이익 유도 위주의 선거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점들이 자민당 내에 일정한 다양성을 낳고 논의를 활성화시켰던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소선거구제에서는 자민당 공인 후보는 한사람으로 좁혀지게 된다. 파벌의 힘이 약해지고 대신 당 중앙의 총재, 간사장이 공인과 정치 자금에 대해 강력한 재량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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