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는 공통적으로 ‘리얼리즘’을 그 세계관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양자 모두, 자기 이익이나 자기 보전을 추구하는 행위자의 거래나 투쟁에 의해, 누가 무엇을 얻는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가 결정되는,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유 경제’가 사회의 저항을 배제해가며 새롭게 창출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강한 국가’가 요청된다. ‘세계에서 가장 기업이 활약하기 쉬운 나라’(2013년 제183회 국회에서의 아베 총리 시정 방침 연설)란 보수 통치 엘리트들이 권력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개혁’을 실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수 통치 엘리트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전후 민주주의를 짊어왔던 정치 세력이나 제도가 방해가 된다. 그리고 전후 민주주의를 지탱해왔던 것은 노동조합이나 그 지지를 받았던 정당이었고, 이러한 혁신 세력과의 계급 간 타협을 통해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던 55년 체제에서의 ‘보수 본류’, 즉 ‘구우파(올드 라이트)’ 연합이었다.

신우파 전환이 진전을 이루고 이른바 그 정적에 해당하는 혁신 세력과 구우파 연합이 제각각 1990년대 중반이나 2000년대 초반까지 와해되어버리자, 신우파 연합이 애당초 주장했던 ‘자유’의 가치는 급속히 그 내실을 잃어갔다. 승리를 거둔 가운데 신우파 연합은 변용되어버렸던 것이다.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기 위해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중국이나 한국을 ‘배려’해야 한다는 국제협조주의의 대전제가, 나카소네의 국가주의적 지향의 확대를 억제하고 있었다.

애당초 오히라 정권에서는 안보 측면에서의 대미 협조와의 긴장을 내포하면서 그것과 밸런스를 유지하는 형태로 구상되었던 것이 경제 문화 측면에서의 국제협조주의였다. 또한 그 양자를 통합시켰던 것이 그의 ‘종합 안보 전략’이었다. 거기에서 미일동맹 강화로 보다 중점을 옮겨놓았던 것이 나카소네였다. 그리고 유엔 중심주의 포즈를 취했지만 군사적 측면으로 국제협조주의를 확대 해석해갔던 것이 오자와였다.

하시모토 이후(오부치, 모리 요시로) 중국, 러시아, 한국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외교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애당초 경제 문화 교류 등을 중시한 다국 간 협조를 지향했던 국제협조주의가 군사와 경제 양쪽에서의 대미 추종이라는, 상당히 본 취지와 거리가 먼 내용으로 바뀌어가는 전환점이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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