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에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끌어들여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의 계몽주의와 최근의 상대적 발전이 일반화하고 전파한 가치들은 지난 수천 년간 서구가 경험한 오래된 서구적 유산의 일부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공자는 아시아적 가치라는 상상의 건축물에서 두 개의 기둥, 즉 가족에 대한 헌신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지적하였다. ‘아시아적 가치’의 힘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국가의 역할을 가정의 역할이 확장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공자가 말했듯이 이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파악해야 할 요점은 현대의 ‘아시아적 가치’의 지지자들이 그것의 권위주의적 관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그들의 생각이 작가들과 전통을 극단적으로 좁게 선택한 것에 기반했다는 것이다. 자유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한 문화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서구의 전통만이 유일하게 자유를 기반으로 사회적 이해의 접근법을 제공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가 여러 중요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기반인 단순한 자기 이익의 추구에서 벗어난 동기 구조를 갖고도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특이한 사실을 이해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현재의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직면한 큰 도전에는 불평등의 문제(유례없는 번영의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빈곤의 문제), ‘공공자산’의 문제(환경과 같이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자산)가 포함된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법은 확실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서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의 범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더 민감한 윤리를 적절히 발전시킴으로써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주된 교훈은 사회적 선택에 대한 합리적 평가의 무용성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측 가능한 결과들을 예상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것은 의도의 힘에 압도당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부수적 효과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루이스가 지적했듯이) 둘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데도 발전에 대한 이 두 가지 접근법이 왜 실질적으로 일치하지 않는가? 자유에 초점을 둔 것이 어떤 차이를 불러오는가? 그 차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유에서 생겨나는데, 각각 자유의 ‘과정의 측면’과 ‘기회의 측면’에서 온다. 먼저 자유가 의사결정 과정과 동시에 가치 있는 산출을 성취할 기회와도 관련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관심영역은 산출이나 소득의 진작 혹은 더 높은 소비의 달성(혹은 경제성장과 관련된 다른 지표들)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성과에만 한정될 수 없다.

현재의 경제분석은 기본적으로 자본축적을 물리적 관점에서 보는 것에서 인간의 생산적 자질이 통합적으로 관여된 과정으로 보는 것으로 강조점이 상당히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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