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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말하다 -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ㅣ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6
가라타니 고진 지음, 고아라시 구하치로 들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3월
평점 :
이 책은 독자들의 접근이 용이한 '대담'이라는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서로 씌여진 <세계공화국으로>의 자매편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세계공화국으로>보다 흥미로운데, 첫째 인간 가라타니와 그의 사상 사이의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둘째 1960년대 대학생부터 가장 최근의 사상적 역정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옮긴이 후기 , p186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의 <정치를 말하다 柄谷行人 政治を語る>의 성격은 옮긴이 후기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저작에 대한 전반적인 조망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정치를 말하다>가 그의 전집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 여겨진다.
메이지 이래 일본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국가나 네이션은 명확히 능동적인 주체로서 존재합니다. 사실 일본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일본제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국가에 의해 시작되어, 이후 민영화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험에서 보면, 국가나 네이션을 그저 표상이나 상부구조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국가나 네이션은 단순히 환상이나 표상이 아니며, 그 자체의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32
저자는 <정치를 말하다>에서 자신이 '자본주의=국가=네이션'이라는 도식을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조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위와 같은 관점은 <트랜스크리틱>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되는데, 그 계기는 소련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였다. 관념론적인 그의 탐구가 이 사건 이후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띄게 되었음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밝힌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공산혁명을 실패로 끌고내려갔는가?
1991년에 소련이 현실적으로 붕괴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오히려 소련이라는 존재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p68)... 소련붕괴, 즉 미소 이원적 구조의 붕괴는 동시에 철학적 논의의 리얼리티를 빼앗아갔습니다. 소련이 붕괴하자,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탈구축적 힘에 기대한다는 식의 레토릭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탈구축적 힘은 완전히 노골적이 되어 전 세계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지요.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69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상품교환이라는 경제적 하부구조에 초점을 맞췄기에 계급을 넘어선 국가와 네이션의 문제에 답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그러한 하부층위의 문제가 아닌 상부층위에서 국가와 네이션과 관계를 맺으며 존속한다. 이와 같은 고진의 관점은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주장한 관점 - 시장경제 위에 다른 층위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라는 교환양식 - 을 떠올리게 한다.
마르크스는 초기부터 화폐 또는 자본재경제를 종교비판을 응용하여 비판하려고 했습니다. 이 과제를 <자본론>에서 완수하려고 했지요. 이것은 역사[史的] 유물론의 공식과는 무관합니다. 역사유물론에서는 경제적 하부구조(토대) 위에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는, 말하자면 상품교환이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형성된 종교적 상부구조로서 존재합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46
마르크스주의는 항상 국가와 네이션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즉 스탈린주의나 파시즘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반성에서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말하게 되고, 또 고유한 차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p80)... 내가 생각하게 된 것은 국가나 네이션을 상품교환과는 다른 교환양식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81
이처럼 마르크스 이론은 국가와 네이션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힌다. 한계상황에서 고진은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를 등판시킨다. 칸트가 <영구평화론 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에서 보여준 하나된 세계로서의 가능성 안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구체적으로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모습으로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실현될 것이다.
칸트는 '구성적 이념'과 '규제적 이념'을 구별했습니다. 또는 이성의 '구성적 사용'과 '규제적 사용'을 구별했습니다. 구성적 이념은 현실화되어야 하는 이념입니다. 규제적 이념은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지표로서 존재하고, 그것을 향해 서서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념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가 부정한 것은 구성적 이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71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유란 자발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칸트는 도덕법칙으로 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그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서도 다루어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득이합니다. 그러나 타인을 수단으로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상대를 목적(자유로운 존재)으로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칸트는 상인자본을 개재시키지 않는,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을 제창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76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는 현실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을 설명하는 <트랜스크리틱>, 그리고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세계사의 구조>라는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그의 입장이 간략하게 나마 모두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를 말하다>는 그의 전집의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트랜스크리틱> <세계사의 구조>로 들어가 보자...
내가 말하는 반복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자본주의에는 반복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경기순환이 그렇습니다. 공황->불황->호황->공황 .... 왜 이런 순환이 존재하느냐 하면, 자본주의 경제는 발전하면서 공황과 불황을 통해 폭력적인 도태와 정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반복은 말하자면 반복강박적인 것입니다. _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