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네트워크 2 - 지역을 넘어선 교류 케임브리지 세계사 8
크레이그 벤저민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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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교환 체계가 존재했고, 그 중심지에 복잡한 구성의 대규모 어스워크를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호프웰의 사회-정치적 구조는 서로 평등한 관계의 무리 혹은 부족 공동체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들이 장례 시설과 연관된 캠프나 마을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씨족 네트워크와 경제적 교환 체계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을 포괄하는 더 큰 범위의 공동체는 훨씬 더 큰 지역을 아울렀고, 공통된 우주론에 기반을 둔 상징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 , p512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 - 지역을 넘어선 교류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V>에서 독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교류를 발견한다. 그리고, BCE 1200 ~ CE 900년까지의 세계에  오스트레일리아나 미크로네시아의 부족 단위 소규모 교류로부터 유라시아 대륙을 육로와 해로로 연결하는 실크로드(Silk Road)와 같은 거대한 교류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같이 문명들간의 교류 형태를 갈라놓았는가? 


 우연한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겠지만, 박트리아는 언제나 역사의 교차로에 놓여 있었다. 그곳은 문명이 시작되는 곳이자 끝나는 곳이었다. 박트리아에서 내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인도아대륙, 근동, 지중해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만났다. 어떤 이유에서든 박트리아에 정착한 사람들은 그 특성상 문명 소통적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 사회는 환경 때문에라도 다문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 , p128


 아쉽게도,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에서는 이러한 지역별 차이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 속의 수많은 문명(文明)과 시대에 남긴 이들의 자취를 보여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만약, 이 물음에 대해 궁금하다면 다른 책들을 참고하도록 하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이 시기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청동기 시대로부터 철기 시대로의 변화가 시작된다. 청동기가 제사장으로 대표되는 성(聖)의 상징이라면, 철기는 왕/군주로 대표되는 속(俗)의 상징이다. 성의 권위가 쇠퇴하고 속의 권력이 올라가면서 이들은 상호 대등한 위치에서 제국의 통치권을 두고 다른 형태의 교환관계를 맺는다. 


 당시의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금속 기술과 전쟁 기술의 혁신이었다. 예컨대 유라시아 지역에서 전차(戰車) 사용이 유행한 시기는 기원전 제2천년기였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 인도유럽어족 가운데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는 언어의 사용자들이 당시 이미 이란고원과 인도아대륙에 진출해 있었는데, 말 사육과 전차 사용이 그 증거였다(p34)... 마지막으로 중요한 변화는 청동기 대신 사용한 철기였다. 유라시아 세계에서 철기의 사용은 군사 분야 뿐만 아니라 종교적 관습도 바꾸어 놓았다. 검(劍)은 더욱 강해졌고, 청동긱에 글자를 새겨 신전에 성물로 바치는 관습도 시들해졌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 , p35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형태로, 동아시아에서는 유교의 형태로 등장한 종교(통치이념)은 제국을 유지하는 사상적 기반과 사회의 틀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왕/군주는 저마다 '신의 뜻'과 '천명 天命'을 외치며 자신들이 실리를 채우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 끊임없는 확장을 꿈꾸었다. 그리고, 당대의 여건으로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계상황에 놓였을 때 그들은 교류를 통해 다른 문명과 공존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최고 권력자들은 저마다 제국을 꿈꾸었다. 즉 왕국의 군주가 천상의 신을 대신하는 지상의 대리인으로 선정되고자 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기독교 개종이 다양한 전략적 의미를 지녔다. 이를 통해 세계 권력의 헤게모니에 동화되고 적응할 뿐만 아니라 그에 저항하고 차별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 교단 조직의 통합 위계질서는 동서 로마 지역에서 모두 새로운 계급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 , p273


 유교는 진(秦)나라(221 ~ 210 BCE) 때 크게 쇠퇴한 적이 있었다. 진나라에서는 법가(法家)를 통치 철학으로 채택했는데, 유교의 최대 라이벌이 바로 법가였다. 법가를 기반으로 진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내세워 전국 시대에 6개의 다른 왕국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하고 서한(西漢, 202 BCE ~ 9 CE)이 들어서자 유교에 획기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는 기회인 동시에 도전이었다. 한나라의 유학자들은 기꺼이 기회를 붙잡았다. 그들은 시대적 도전을 감당하기 위해 유교의 새로운 교리를 발전시켰고, 당시 신생 제국의 기반을 다져야 했던 한(漢)제국이 당면한 과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 , p336


 이 시기 고대 제국들은 농업에 기반한 나라들이었다. 생산에는 비옥한 토양과 적절한 온도, 때에 맞춰 내리는 비 등 자연요소가 중요했고, 소수의 특산품이 지배층에게만 판매되었기에 오늘날의 교류와는 규모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그렇기에 고대 제국은 비교적 수평적인 국가들의 연합체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제국주의(Imperialism)과는 달랐다. 그렇게 본다면, 같은 시기 바다로 가로막힌 해양 문명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들의 교환양식이 '증여'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은 문명의 특성이라기보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물은 풍부하지만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지역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이 모여서 이른바 문명을 만들었다면, 그들과는 달리 문명을 만들지 않았던 이들에게 애니미즘 이상의 종교도, 조개 이상의 화폐도 없었던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던' 하나의 축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하면 그리스 사상과 전통이 광대한 지역으로 확산된 일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헬레니즘화(Hellenization)라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 동쪽을 향해 계속해서 뻗어 나가는 동안 그는 그리스 세계와 끊임없이 접촉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새로운 도시와 군사 거점을 건설하여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군부대를 주둔시켰다.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동부 유럽 등지에서 새로 건설된 도시는 250개가 넘었다. 이러한 도시와 식민지는 헬레니즘 전파 및 그리스와 타문화의 융합에 막강한 도구가 되어주었다. _ 크레이그 벤저민 외, <케임브리지 세계사 8 : 제국과 네트워크 2> , p150


농업 생산은 제국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으로, 운하 시스템과 카나트(qanat, 건조 혹은 반건조 지대에 지하수를 끌어 저장하는 수로 체계) 건설에서 중요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건설 공사의 결과 이집트에서 아라비아, 그리고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경작지 면적이 확장되었다. 수로 건설의 혁신적 성공 이후로는 강 유역에서뿐만 아니라 건조 지대에서도 농업이 가능했다. 유라시아 세계에서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규모의 경제 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 P50

청동기 문화의 몰락은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노예 반란 등 내부의 사회 및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외부자의 침략과 이주 문제가 있었는데, 이들이 도시를 파괴하고 무역과 생산 체제에 혼란을 초래했다. 전투 방식과 무기의 변화도 원인이었다. 특히 철제 무기가 도입되면서 전투에서 보병의 역할이 가장 중요해졌고, 그 결과 전차를 이용하는 왕과 부유한 귀족의 힘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연재해가 있었다. 화산 폭발, 지진, 가뭄 등으로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고 기근에 시달렸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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