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과 이름과 사연을 전하려는 시도는 모두 ‘2차가해’로 몰아붙여졌고, 상주도 영정도 위패도 없이 애먼 국화꽃만 잔뜩 놓인 국가 공식 조문소를 혼자 반복해서 방문하는 대통령의 기이한 모습만 계속 보도되었다. 그렇게 죽음과 고통은 비가시화되었고, 피해자와 우리의 공통됨은 희석되었으며, 그런 만큼 그들의 아픔과 죽음에 정서적으로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이런 과정은 보수정부 그리고 보수언론이 세월호참사로부터 ‘배운’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태원참사는 국가능력의 퇴화를 세월호참사 때보다 더 순수하게 드러낸다. 세월호참사나 그 이전 용산참사가 보여주듯이, 커다란 참사는 항용 국가와 자본의 잘못이 겹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태원참사는 자본의 탐욕과 무관하고, 오롯이 국가가 마땅히 기울여야 했던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일어난 사건이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국정 지지율 조사가 보여주듯이 싸늘하다. 그런 윤석열정부를 현재 지탱하는 것은 아직 그에게 임기가 많이 남았다는 사실, 검찰의 선별적인 고강도 수사와 기소가 그 대상자는 물론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 그리고 여느 정부 시기보다 더 대자적(對自的) 의식을 획득한 엘리트 카르텔(이 카르텔을 구성하는 주축은 두말할 나위 없이 집권세력, 재벌, 보수언론이다)과 무모한 일부 극우단체의 연합 정도이다.
좀더 넓게 조망해보면, 윤석열정부의 등장과 그것에 이어지는 혼란은 촛불혁명이 담고 있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비전을 구현할 ‘대전환’을 감행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현 상황은 더 높은 봉우리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기적으로는 어려움과 고통을 불러올 수도 있는) 계곡 앞에서 더듬거리며 소극적이었던 문재인정부와 그들을 제대로 견인하지 못한 민주진보진영이 초래한 정치적 퇴행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3) 그러므로 윤석열정부의 수립에 반대해온 이들 또한 반대했다는 사실만으로 현 상황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을 수는 없다.
타인의 품성에 대한 분노 같은 감정이나 판단은 일단 형성되면 반박하는 사실이 제시되어도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 최초 형성은 사회적 교류 속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뤄지고 확산도 쉽게 된다. 정직하게 돌이켜보면 비난에 동참한 이들 대부분이 품행을 의심받은 이들에 대해 직접 확실하게 아는 정보가 없었다는 것,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점검할 만큼 사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의견과 주장이 실은 부정적 보도가 쏟아지는 가운데 자신보다 확신에 차서 언성을 높이던 주변 사람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이따금 말을 거들어주기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과정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며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는 나르시시즘의 회로를 따라 발언을 주장으로 그리고 신념으로 굳혀가곤 한다.
그러나 현 대통령의 품행에 문제가 많다고 해도 품행 비판의 화살이 지금처럼 대통령만을 향하리라고 예단할 수는 없다. 품행 논란은 지난 정치 과정이 입증하듯이 언제든 윤대통령의 반대파를 향해서 더 날카로운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 더구나 품행을 공격함으로써 정적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더 큰 자원을 보유한 쪽은 집권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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