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이 책에서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하려고했습니다. 칸트는 일관되게 도덕적 실천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가 도덕적이나 실천적이라는 말로 뜻하고자하는 것이 통상적인 의미와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고 도덕이라는 말은 통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즉 도덕이라는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라는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라는 말을 ‘자유‘라는 의무와 관계하는의미로 사용합니다. 당부의 말씀을 드리자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의가 아닙니다.  - P1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도덕성 · 윤리성과 만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키르케고르라면 윤리A와 윤리B라고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는 세상(공동체)이 부과한 선악의 기준입니다. 다른 하나는 도덕성을 ‘자유‘에서 찾는 사고입니다. 칸트가 제기한 사고는 후자입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동일한 도덕성, 책임, 자유라는 말이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 P38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찾으면 부모, 학교, 환경, 현대사회와 같은 것으로 소급하게 됩니다. 그결과 그런 행동을 한 이의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그렇게 되면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인이 어떻든간에 그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요. 그 결과 여러 원인에 대한 해명은 잊히고 맙니다.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원인은 철저하게 추궁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문제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 P44

아이를 아무리자유롭고 평화주의적으로 키워도 공격성은 남습니다. 중요한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인식한다고 해서 사태가 바뀔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잘못된 대처나 환멸이나 좌절은 없어질 것입니다. 요컨대 책임이라는 것과 인식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 P54

칸트는 확실히 "자신의 격률이 보편적인 법칙에 합치하도록 행동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본래 그것은 행위지침이 아닙니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우리는 행위에서 자유(자기원인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못을 저지르고, 원하는 대로 실현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그 일에 책임감을 갖는 것은 실제로는 자유가 아니어도 자유인 것처럼 간주할 때입니다. 칸트의 "우리는 행위자스스로가 이런 행위 결과의 계열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 것처럼 간주해도 좋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저지르곤 합니다. 그렇다면 몰랐을 경우에는 책임이 없을까요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책임이 있습니다. - P80

좋은 사원이 되라, 좋은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 세상의 도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에 반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도덕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오랜시간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의무‘에 반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102

예를 들어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스테이크를 먹습니다. 나는 군사적·경제적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생활수준을 누리고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자기가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차이는 괄호에 넣어야합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이 죄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인간을 용서합니다. 실제로 간음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실제로 죽이는가 죽이지 않는가라는 차이는 절대성 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윤리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 P113

 ‘도덕법칙‘을 알고있어도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행할지 어떨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거기에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유의지로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모르는 원인들에 의해 규정되고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도덕법칙을 알고 있는 것처럼 간주할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정말 몰랐는가‘와는 무관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원인들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헤겔처럼 실제로 있었던 일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 P118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죽은 대중의 목소리‘ 일까요.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의지를 대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P133

야스퍼스는 뉘른베르크재판을 ‘형사적 책임‘의 문제로 간주하고, 그 다음으로 정치적 책임, 도덕적 책임하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형사적 책임‘을 충분히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후 일본의 ‘전쟁책임론이 항상 애매하고 불투명하게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 P153

오늘날 사료적으로 명확한 사실은 전쟁 시기의 천황은 단순히 꼭두각시 인형도 평화를 애호하는 입헌군주도 아니었고 도리어 전쟁과정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천황 자신이 지위보전을 위해 그것을 획책했습니다. 전쟁 말기 그것은 ‘국체의 수호‘로 표현되었는데, 결국 천황제와 천황개인의 지위 수호가 당시 권력의 최대 목표였습니다.  - P157

전후 첫 수상은 황족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淵宮秘였는데, 그는 수상으로서의 첫 라디오 방송에서 ‘일억총참회‘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책임을 일부 지도자 탓으로 돌리지 말고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짊어지고 반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최고지도자의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의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할까요. 전후 도쿄재판에서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추궁을 당한 군인, 정치가 다수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습니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명령이 천황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런 천황이 면책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것을 ‘무책임의 체계‘라고 부르고 그 원인을 해명하려고 했었습니다.  - P158

덧붙여 일본은 조선이나 대만, 만주 등을 식민지로 만들고동아시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영국이나 프랑스등이 행한 식민지지배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일본과 같은 ‘후진‘ 제국주의국가의 그것만을 ‘침략‘으로서 비난하는 것은 기묘하지 않은가.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서양의 식민지주의에 대한 책임이 문제시되는 시대가 머지않아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일본의 죄를 없애주는 것이 아닐뿐더러 서양 사람들의 원한이나 보복의 문제도 아닙니다. 세계사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국가‘에 근거하여 행동해온 지난 인류사를 반복해서는 안 되며, 그때 각 나라사람들은 각국의 행위를 주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P187

역사의 재검토revisionism라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없었다, 남경대학살은 없었다와 같은 사고가 리비저니즘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책임‘을 소거하는 방향에서 이야기되는 재검토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의 재검토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고, 여성의 눈에비친 역사가 있고, 동성애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습니다. 아직 그것들은 소리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서히 침투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P188

하지만 선진국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후진국에게 경제성장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대재해는 환경오염에 책임이 없는 후진국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날 것이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합의‘를 필요로 합니다. 덧붙이자면 위기를 체험하는 것은 오히려 아직 태어나지 않은사람들입니다. 살아가고 있는 성인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그들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윤리성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타자와의 관계에도 존재합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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