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성공‘과 ‘기적‘은 개국과 근대 과학기술 습득 개시의 적시성, 국가의 강력한 지도와 진취적 경영자의 출현, 에도 시대 이래민중의 높은 문자해독률, 능력도 의욕도 있던 사족의 자제가 능력을 발휘토록 한 효과적인 교육제도의 형성, 재래직인층 내부 ‘풀뿌리 발명가‘의 탄생 등을 원인으로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농촌 노동력의 가혹한 수탈과 농촌 공동체의 무참한 파괴도 불가결의 요인이 됐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P131

철도 건설은 조선의 쌀과 목재, 광석 등을 수입하고 면포 등 제품을 한국에 수출하는 경제적 목적과, 대륙을 향해 군대를 신속히 수송하는 군사 목적으로 추진됐다. - P142

조선반도 철도 건설에서 경제와 군사 중 어느 쪽에 더비중을 두었는지, 재계와 군·관료 중 어느 쪽이 이니셔티브를 쥐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일본 연구자들 간에 이론이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당시 한국에 대한 최대 투자였던 경부철도에 일본 자본가가 서구 자본가와 공동 대응하는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 특히 육군은 이런 구상을 거부했다.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군사적·정치적 관점이 경제적 관점을 압도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타당할 것이다. (이시이 2012) - P143

향후 전쟁이 총력전이 되면 평시의 산업 생산 능력과 연구개발 능력은 잠재적 군사력을 뜻하고, 평시부터 능력을 높여 전시에 국력을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하는지가 전쟁승리의 조건이 된다. 바꿔 말하면 평시란 다가올 전쟁의 준비기간이고, 평시 생산 능력의 향상과 자원 비축, 과학연구와 기술 개발은 전쟁 준비의 의미를 띠게 된다.  - P188

현지에서 일했던 일본인 기술자는 "저렇게 전력이 풍부하지만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일본인 주택지역뿐이었다. 흥남만 반짝하고 전기가 들어오지만 산 하나만 넘어가면전기는 없었다"고 했다. (사와이 2015) 거대 발전소의 전력은 콤비나트와 일본인 주택지에만 사용됐던 것이고, 토지를빼앗기고 강제 이주를 당하거나 가혹한 노동에 내몰린 현지 조선인과 중국인에게는 어떤 혜택도 없었다. 에너지혁명에 의한 최신 화학공업의 발전은 한편으로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력 수탈에 의해 지탱되었던 것이다. - P202

그 후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국내 노동자의 다수가 전쟁에 동원돼 노동력이 한층 부족해지자 강제연행으로 끌어모은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연합군 포로가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일을 강요당했다. 조선인이 가장 많아 1939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72만5,000명이 연행됐다. (다케우치 2014년) - P275

역사학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지적한 것처럼 "만주 땅에서 시작된 총력전 체제는 전후에도 모습만 바꾼 채 살아남아 고도성장을 준비했던 것이다. (고바야시, 2004) - P281

일본 현대사 연구자 존 다우어는 "쇼와 시대의 마지막몇 년간에 이르면, 민수 목적으로 개발된 일본의 고도기술을 군사 목적으로 전용한 여러 사례에서 보듯 일본은 군산복합체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세계 유수의 군사적 액터로서의 잠재 역량을 비축할 만큼의 눈부신 기술적 성과를달성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했다. (다우어 2001) 일본인 스스로가 깨닫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하는 척해도 외국 연구자는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 P314

 경제성장의 지속을 전망하기 어려워진 이 시점에서 재계는 이미 군수 생산의 확대를 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아베 정권하에서 공공연한 현실이 되면서 재계와 정부가 군수 부문을 ‘일본경제의 견인차‘로 기대하기에 이른 것이다. 실제로도 예를 들면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도시바는 이미 가전 부문을 중국 기업에 넘겼고, 원전 부문은 파탄한 데다 그 때문에 반도체 부문도 포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남은 것은 군수 생산 부문뿐이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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