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 근대 동아시아와 말기조선의 시대구분과 역사인식
이삼성 지음 / 한길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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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화단사태 이전까지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에 경제적으로 침투함에서 중국 정부와 개별적인 양자협정의 형태를 주로 취했다. 하지만, 의화단사태 이후 열강들은 경쟁적인 차관계약(competitive loan contracts)을 점차로 회피했다. 대신 그들 서로 간에 협력적 컨소시엄(cooperative consortiums) 형태로 중국에 대한 자본진출 방시을 변화시켰다. 중국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카르텔적 성격을 재확인해주는 것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425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멸망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가 이전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중화질서의 붕괴다. '조공-책봉'체계를 중심으로 연결된 동아시아 질서는 1840년대 아편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흔들리며 조약 중심의 세계질서로 대체된다. '조공-책봉'체제에서 형식적인 위계질서는 '조약'으로 형성된 제국주의 국제 질서 안에서 실질적인 위계질서로 대체된다. 이 모든 것은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 극히 짧은 기간에 이뤄진 혁명의 결과였다. 


 유럽에서 정치혁명은 산업혁명과 시간적으로 맞물리면서 함께 전개되었다. 경제에서 산업혁명이 '성장의 한계'에 갇힌 전 근대적 경제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었듯이, 정치혁명은 전 근대적 정치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민(臣民)은 시민(市民)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 동양에서는 전 근대적 경제질서와 함께 전근대적인 정치질서가 지속되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11


 19세기에 경제면에서 산업혁명과 정치면에서 시민혁명은 유럽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분업을 통한 대량생산체제는 저가의 원료공급지와 대규모 소비지로서 식민지가 필요했으며, 시민혁명을 통한 평등의식의 확산은 대외 침략의 이익을 분배하는데 기여하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19세기는 이와 달랐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지배세력의 유교적인 정치경제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사회안정도 경제팽창과 함께 유지되었다. 이 같은 안정 속의 시장팽창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자본주의조차 중국에서는 그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광범한 원시산업화가 근대적인 공장형 산업의 발전으로 진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은 애덤 스미스적 성장 한계인 농업적 동학 안에 갇혀 있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10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 우리는 이와 관련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4세기 전후 유행한 페스트로 인해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노동력 절감을 위한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고, 여기에 더해 바다 건너에 있는 식민지로의 인구 유출은 자본집약적 생산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안정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농업에서는 잉여생산인력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기에 큰 변화가 생겨날 수 없었다. 지속적인 안정과 평화가 결과적으로 중화질서를 무너뜨리는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전통적 왕조체제는 초기에는 나름대로 생명력으로 넘쳐나기도 했다.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 관료기구의 기강을 세우는 등 국가경영에 혁신을 도입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실과 지배층은 부유하지만 국가는 가난해진다. 국가 관료 기구는 비대한 지배층의 민중에 대한 통제 불능의 수탈기구로 전락해간다. 민중은 반란을 일으키고, 왕조는 기강이 해이해진 군사력을 긁어 모아 간신히 반란을 진압한다. 경우에 따라서 외세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게 된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55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한 결과 기득권들은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하고, 밑으로의 수탈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사회불만이 쌓이다가 민란이 일어나는 공식. 청나라와 조선 말기 보여진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 ~ 1864)의 난과 동학농민혁명(1894 ~ 1895)는 이같은 성격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동원하려 했던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부르주아 혁명으로 정치혁명을 이뤄냈던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동아시아의 절대왕정 편에 서서 사회적 모순을 지켜내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청나라와 조선이 이같이 기득권의 논리에 의해 끌려갔다면, 이와 상반되는 사례가 개화기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변동의 핵심은 반외세의 슬로건인 존왕양이를 주창하는 세력이 일본 국가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이 동시에 개국과 개화의 추진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외세 자주를 추구하는 것과 개방과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지배층의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편으로 지배층과 일반 민중 사이의 일정한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게 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10


 기득권의 권리 수호와 기득권의 교체. 19세기 동아시아 질서는 여기에서 결정된 것이 아닐까.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췄던 청나라와 조선은 그 권력이 외척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 아래에서 권력이 사유화된 반면, 그보다 지방권력의 성격이 강했던 일본에서는 유사 시 막부(幕府)를 대신할 번(藩)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혁명을 이뤄냈고, 그 결과 일본은 중화질서의 변방에서 중화질서 해체의 선봉장이 되었다.


 일본이 궁극적으로는 요동반도를 포기했지만, 두 가지 점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화질서의 종언을 의미했다. 첫째, 중국의 영토인 대만과 팽호 열도가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변방이었던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둘째, 중화질서의 마지막 남은 속방이자 그 질서 건재의 상징이었던 조선을 중화질서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조약으로 공식화했다. 이를 또한 세계 열강이 다같이 공인했다는 점에서 중화질서의 종언은 최종적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376


 물론, 개화기 일본에서 보여진 변화의 움직임은 이후 천황을 정점으로 한 와(和)의 세계로 굳어지면서 군국화되면서 근대화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동쪽 끝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서쪽 끝이길 원했고 이러한 그들의 열망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단어를 통해 단적으로 알게 된다. 자신들을 검은 머리 서구인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를 통해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질서로부터 고립된 그네들의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이해못할 바는 아닐 것이다.


 요컨대 일본에 1890년대라는 10년간은 국가기구로서의 천황제와 가족제도로서의 가부장제를 각각 헌법과 민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확립한 시기였다. 그것을 일본 국민 전체의 뇌리에 획일적으로 주입시켜 천황제 국가체제를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해내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근대적인 전 국민 의무교육제도였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27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는 이렇게 '조공-책봉'체제를 무너뜨리고 '조약'에 근거한 새로운 국가질서의 등장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무력에 의해 강요된 세계질서가 칸트주의에 입각한 국제조약이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기에 이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에게 조약체제는 불평등 체제에 다름아니다.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조공체제는 불평등에 바탕을 둔 미개한 질서이고 서양의 국제법 체계는 주권적 평등에 기초한 말 그대로의 '만국공법'이었을지 모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피차 일반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서양이 만국공법의 이름 아래 중국에 부과한 질서야말로 정치군사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경제에서까지 적나라한 이익의 관점에서 침탈적인 질서를 명분으로 감싸 강요하는 것이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많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307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는 서구세력의 중국 침탈 시 보여주었던 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인도 등지에서 벌어졌던 제국주의 세력간의 치열한 다툼 대신 중국에서는 철저한 협력과 이익분배가 행해진다. 시쳇말로 아편으로 혼미한 중국을 '다구리 치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시간이 흘러 깨어난 중국을 막기 위해 단합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의 순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비서양 세계에 대한 서양의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적 진출은 매우 경쟁적이고 갈등적이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은 해외에서 식민지쟁탈을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곤 했다. 이에 비해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인 20년간의 전쟁의 과정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중국 침탈 과정이 서양 식민주의 전개과정의 일반 패턴과는 달리 '제국주의 카르텔'의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하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이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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