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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 전통시대 동아시아 2천년과 한반도
이삼성 지음 / 한길사 / 2009년 4월
평점 :
기원전의 세계로부터 약 2천 년에 걸쳐 존재한 중국 중심적 동아시아 질서는 크게 두 방향의 '관계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중국 농경문화와 북방 초원지대에 근거를 둔 유목민족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 베트남 등 중국의 동방 또는 남방에 있는 사회들과의 관계축이다. 기본적으로 같은 농경문화권 사이에 발전해간 국제질서이다. 전자를 중국-북방축이라 하고, 후자를 중국-동남방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86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는 고대부터 17세기 병자호란(丙子胡亂) 시기 까지 동아시아 외교사를 정리한 책이다. 본문에서 저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으로는 '조공', 정치적으로는 '책봉'이라는 외교체제에 대해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1907 ~ 1991),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1919 ~ 1998), <요동사>에 나타난 김한규의 인식을 비교한다.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이들의 관점은 각기 독창적인 장점과 함께 한계점을 갖는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비판하면서 이를 종합하여 저자의 역사관을 형성하는데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은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아시아의 고대 ~ 근세사다.
중국대륙의 실체는 하나의 중앙정부의 팽창과 수축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대륙의 역사, 그리고 그 대륙과 한반도의 관계의 역사는 중화세력과 북방 민족들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함수였다. 한반도가 침탈의 대상이 된 역사적 조건은 중국 중원의 중앙정부의 힘의 함수가 아니라 중화세력과 내륙 아시아권의 북방민족들이라는 다행위자들의 역학의 함수였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223
저자는 먼저 강력한 중앙정부로서 중국(中國)의 존재에 대해 회의(懷疑)한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은 단일한 한족(漢族) 중심의 대륙국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황하 이북의 초원 제국과 황하 이남의 농경 제국간의 치열한 공방이 우리에게 가해진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의 실제 모습이었음을 말한다. 통일된 중앙정부보다 분열된 두 세력의 다툼이 역사의 실제라면, '조공-책봉' 체제는 어느 한 편의 절대우위에서 다른 편에 강요된 양상이 아니라 상호 인정을 통한 갈등의 봉합 체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과 주변국 사이의 관계는 19세기 제국주의의 위계질서가 결코 아니었다.
필자는 조공책봉체제(朝貢冊封體制)를 중국의 속방으로 불리면서도 실질적인 내적 자율성을 가진 국가들과 중국 사이에 전쟁과 평화를 규율하는 일종의 '안보 레짐'의 성격을 가진 외교제도였다고 정의하고자 한다.... 공식적 위계질서 안에서도 제국은 지배의 체제이다. 그러나 중화질서에서는 종속적 지위에 있는 국가도 내치(內治)에서 실질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외교에서도 일정한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배의 양식이라기보다는 안보 레짐의 성격이 강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171
저자는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 서구 제국주의 관점의 주종(主從)관계로 바라봤을 때 제대로 된 실체에 다가갈 수 없음을 지적한다. '형식적인 위계관계, 그렇지만 실제적인 독립관계'라는 동아시아 조공책봉체제의 이중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19세기 서구인들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극우집단의 한국사 인식 또한 여기에 기반하여 끊임없는 자기 비하와 함께 한 걸음 나아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하는 잘못된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저자의 이러한 지적은 분명 다시 생각할 부분이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은 법적으로 독립적인 행위자들(de jure independent actors)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사실상의 독립적 행위자들(de facto independent actors)이었다. 조공책봉체졔는 그들 사이의 행태적 역할을 처방하고 활동을 통제하며 기대치를 틀 짓는 일련의 지속적이고 상호 연관된 제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172
조공책봉관계와 함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부분은 일본의 특수성이다. 동아시아의 일원이면서도 지정학적으로 섬(島)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조공-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질서 안에서 경제적인 이점만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의 특수성이다. 일본은 동아시아 질서 안에서 정치적인 관계를 선택적으로 맺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상적인 자유가 부여될 수 있었고, 이러한 점이 반도에 위치한 고려-조선과 다른 점이었다.
조공은 공물을 바치는 행위에 더하여 일반적으로는 중국황제의 신하를 자인하는 순종의 정치적 제스처도 포함한다. 그러나 왕위에 대한 중국의 승인을 구하는 것은 조공과는 별도의 의례인 책봉관계의 몫이다. 조선이 중국의 통일제국들인 명이나 청에 대해 맺었던 조공관계는 중국과의 정치적 신속의 관계인 책봉 체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실권자가 중국에 대해 취한 조공관계의 개념에는 책봉에 내포된 깊은 종속관계가 전제되지 않았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425
조공책봉체제가 구축한 중화(中華)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주변국가 일본. 그들의 경계성은 그들을 오랑캐로 만들었지만, 반대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는 그들의 첨병(尖兵)으로 자임할 수 있었음을 본문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일본의 성리학(性理學)이라 하겠다. 책봉체계에 매어 있던 조선에서는 성리학적 질서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이단 시 한 반면, 정치적 구속이 없었던 일본은 독창적인 유학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점은 이후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이 주변성은 오히려 일본에게 동서양의 전략적인 중간자, 그리고 이어 동아시아 질서에서 선진세력으로 도약하는 지정학적 조건이 된다. 일본이 근세 이후 동양과 서양 사이의 교량 또는 지정학적 중간자의 위상을 갖게 만든 것은 우선 일본의 독자성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함께 조선을 포함하는 중화권이 경제적 번영의 시기임에도 갖고 있던 정신적 내향성과 경제적인 비상업적 경향도 동아시아가 서양으로의 통로와 교량의 역할을 일본에 일임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420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에서는 이렇듯 조공책봉체제와 일본의 특수성을 통해 고대부터 근세 중반기에 이르는 동아시아 외교사를 인식하는 틀을 제공한다. 독자들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조공-책봉'의 관계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동맹은 분리되어 접근할 수 있으며, 오히려 분리되어 실리를 취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체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었을 때 빚어지는 참담한 결과가 삼전도의 비극임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고학(古學)파는 이토 진사이(伊藤 仁齊, 1627 ~ 1705)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 ~ 1728) 등의 학문과 그들의 제자 및 동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자학과 그것을 비판한 양명학(陽明學) 모두를 극복하고자 했다(p649)... 일본 고학은 고유한 비판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비판철학이라고 할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론을 개발하였다. 중국의 고전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주희 등 기존 중국 유력 사상가들이 구축해 놓은 정설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방법론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P650
과거 동아시아 정치 질서에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던 만주 등 대륙 세력이 하나의 극점이었고, 대륙과 육로로 연결된 우리는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신 경제적 이익만을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의 지정학적 이점이었다면, 미국-중국의 양강(兩强)의 영향력이 충돌하는 진공상태에 놓여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라면, 과연 과거와 같이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외교를 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까... 이는 한 번 생각할 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