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경은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dhi’의 음역이다. 사마디는 마음을 하나로 묶어sa? 매 순간 적절한 지점에 몰입하려는dhi 간절한 경지’다. 삼매경에 진입하기 위해 잡념의 소멸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마디의 ‘디dhi’에는 인류가 오랜 세월 추구해온 삼라만상의 운행 원칙과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고귀한 가치가 숨어 있다.

수련의 결과로 요가 수련자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기꺼이 수용하게 된다. 나아가 수련자는 그 방식을 삶에 적용하는 열린 마음 상태가 된다. 이 상태를 삼매경三昧境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 리타는 하르의 과거분사로 ‘우주의 원칙에 맞게 조합된 것’이란 뜻이다. 리타는 ‘진리’, ‘법’, ‘질서’, ‘운명’ 등으로 번역된다. 리타가 사회에 적용되면 ‘다르마dharma’가 되고 개인에게 적용되면 ‘카르마’가 된다. 다르마와 카르마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각각 ‘법法’과 ‘업業’으로 번역되었다.

파탄잘리는 마음속 잡념을 잠재우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 후, 삼매경의 두 층위를 소개한다. 이것이 요가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목표 지점이다. 하나는 인식 대상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인 ‘상프라즈냐타 사마디sa?prajn?ta sam?dhi’, 즉 유상삼매有想三昧이다. 다른 하나는 인식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인 ‘아상프라즈냐타 사마디asa?prajn?ta sam?dhi’, 즉 무상삼매無想三昧이다.

파탄잘리에 따르면 무상삼매는 모든 개념이나 표현을 초월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는 ‘아상프라즈냐타’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무상삼매는 ‘무상’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고요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파탄잘리는 오히려 불특정 대상을 의미하는 부정대명사 안야를 이용하여 무상삼매의 오묘한 신비를 설명한다.

모든 것이 정지된 태고의 정적 상태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요가 수련자는 우주적 자아와 마주치기 위해 인내하며 수련해야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수련이 아니라 그런 대상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씨앗을 찾는 수련을 해야 한다.

유상삼매는 물질세계의 본질인 프라크리티와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인 ‘비데하videha’가 하나 되는 과정인 ‘바바bhava’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프라크리티는 마음과 물질을 형성하는 기본 원리이자 내용이다. 인도인들은 우주가 끝없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한다고 믿었다. 우주라는 질서가 창조되기 전, 분리되지 않은 잠재력 덩어리가 바로 프라크리티다. 프라크리티는 잠재력을 지닌 씨앗이다.

우리는 늙음과 그 늙음의 종착 지점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 사회는 올바로 죽기 위한 연습의 장인 삶에서 오히려 죽음을 몰아내기도 하고, 마치 젊음이 죽음을 회피하고 망각할 수 있는 장치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 이들은 모두 하나다.

파탄잘리는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마디’와는 다른, 요가 수련에서 얻는 일상의 ‘사마디’를 언급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가운데 특별한 상태로 자신이 목표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마음이다

그가 자신이 드디어 삼매경 안으로 들어갔다고 자만하는 순간, 삼매경은 그를 내쫓는다. 삼매경에 진입한 그는 그 삼매경이 더 심오한 삼매경의 가장자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적인 자기 자신은 1인칭이면서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인 3인칭이기도 하다.

요가 수련자에게 신이란 최선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 과정에 등장하는 어떤 것이다. 신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수련자의 자아를 유기하고, 신에게 의지하며 자신의 최선을 바치겠다는 의미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종하면서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이를 ‘신’이라고 불렀다. 그런 신은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 밖에 존재한다.

불교 철학은 부정신학의 정수다. 아트만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진아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나타anatta’, 즉 무아無我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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