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위에서 언급했고 불트만자신도 인정하는 대로 기적이야기 (요한복음은 제외)에서 그가 말하는 게리그마를 찾아내기란 어렵다. 더욱이 초기의 전승들로 소급할수록 그렇다.
"케리그마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 있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의 배후를 물어야만 한다."
우리는 기적이야기들을 하느님 나라 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그것은 바로 민중운동과 직결된다. 기적이야기는 바로 민중운동의 일환이다. 민중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다. 그러므로 그 기적사건이 예수 개인에게서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후기 예수의 민중운동에 의해 추가, 변형 또는 창출되었는가 하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면 민중운동사의 규명을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의 민중운동은 예수에게서시작되어 그의 민중에게 계승되었으며, 그것은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이어진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는 기적이야기들을 성격화할 것이다. - P152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바로 이들을 제가 속했던 데로 복귀시키는것은 그들에게 권리회복이며 해방운동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단순히 옛 상태로 환원하는 사건에 머물 수 없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 해방의 경험을 한 것이다. 옛 모습을 다시 찾는 데 그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며, 그 새로운 삶은 민중운동의 일환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 P162

예수의 율법해석을 확대 실천하면 기존질서는 모두 붕괴된다. 기존질서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그 사유화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을 초래했는지는 묻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권력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사유화를 확대하고 유지하기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 P202

끝으로 수난사 구도에 나타난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수난사 전체가 어떻게 그토록 무신적 분위기로 일관되었나 하는 것이다. 게쎄마니에서 골고타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도 신의 개입은 없다.
그는 신없는 현실에서 철저히 패배당하는 약자로서 서술되었을 뿐이다.
유다 민족 일반은 물론이고 그의 소수의 제자들마저 배신하여 내버리고도망하며, 그 중 하나는 예수를 모반한다. 마침내 하느님마저 그를 버린현장이다.  - P264

아니! 예수는 ‘우리‘와 꼭같은 조건 아래에서 수난당했다. 우리가 당하고 있고 당해야 하는 그런 수난을! 이런 인식은 바로 저들로 하여금 그의 수난이 바로 우리의 수난, 그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했다. 이것은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수난당했다"는 인식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P2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