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성현들이 남긴 경전이나 신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정신과 육체,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여겼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정신은 육체를 통해 표현되며, 생각의 결과는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따라서 정신과 육체가 괴리하고 생각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 훈련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함으로써 시작된다. 외부의 자극이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잡념이다. 생각이란 그런 잡념들의 생성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잡념의 원인을 유추하는 이성의 활동이다. ‘명상冥想’이란 외부 자극에 대한 나의 감각을 가만히 바라보는 행위다.

요가는 인간을 신적인 인간으로 승화시키는 신체?정신?영적인 훈련이다. 요즘 사람들은 요가를 유연체조 혹은 피트니스 훈련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요가는 마음을 개간하여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원래 자신을 발견하는 운동이자, 그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혁명적인 운동이다. 다시 말해 요가는 삶의 주인을 교체하는 쿠데타coup d’Etat인 셈이다. 그는 이제 과거에 안주하지 않는다. 요가는 미래에서 온 듯한 멋진 나의 모습이 주인이 되어 현재의 나를 일깨우는 정신적?육체적 운동인 것이다. 즉, 영적인 유전자를 교체하는 마음 혁명이다.

요가 수련자가 수련을 통해 평정심을 반드시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결과는 신에게 달렸다. 만일 그 결과가 수련자의 기대와 다르다고 해도 그것을 신의 뜻으로 여기며 담담하게 수용한다. 이처럼 수련자는 명성과 오명,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인생이란 소용돌이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을 때에야 그는 크리슈나가 말하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종교의 얼개는 ‘경전經典’이고 문명의 얼개는 ‘고전古典’이다. 경전은 종교의 핵심사상을 기록한 책으로, 처음에는 개별 종교의 창시자나 사상가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회자되던 어록을 일정 시기가 지난 뒤 글로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종교 구성원들은 문전에 담긴 내용을 해석하여 삶의 지표로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전통적으로 권위 있는 문장이나 내용이 무엇인지 열띤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 과정이 ‘해석解釋’이다.

생각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것은 흐르는 물이나 공중의 대기처럼 혹은 바람에 흩날리는 풍선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생각의 특징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생각, 즉 잡념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생각은 인간의 감정, 지성 그리고 ‘나’라는 이기적인 자아가 실제의 삶에서 만들어낸 복잡한 결과물이다.

‘요가’라는 단어는 이중적이다. ‘결합’과 ‘분리’라는 상반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이 생각하는 나’인가? 만일 운명적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형성한 나 자신과 거기서 습득한 세계관을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지이며 불행을 초래하는 길이다. 세상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세계관이 무수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개체를 객관적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연습이 요가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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