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유선이 친정을 했던 20여 년 동안은, 비록 위나라의 공격으로 나라가 망했지만,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는 유선의 정치력과 행정 능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다만 황호뿐 아니라 강유를 지나치게 신임한 점은 큰 잘못이다. 『삼국지/강유전』에서는 비위가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강유의 북벌을 견제했고, 따라서 강유는 비위가 죽은 253년부터 병권을 장악해 북벌을 시도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선은 그 이전부터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강유의 북벌은 곧 강유뿐만 아니라 유선의 뜻이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파촉은 야심이 없고 험한 교통로를 지켜 지방 정권의 지배자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원이었다. 그러나 천하통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땅이 아니었다. 유비가 파촉을 정복한 후 다시 형주로 돌아와 허창을 공격하고 관우와 장비에게 관중 공격을 맡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삼국지/등애전』의 배송지주에는 등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이는 등애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지배층이 등애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달랐다. 등애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 강회(장강과 회수 사이 지역)와 관중, 연주, 파촉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 지역은 등애가 지방관 혹은 군사령관으로 주둔한 곳들이다. 등애를 경험한 백성들은 그를 동정했고 그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어주었으며 심지어 신으로 숭상했다. 비록 지배층에게는 외면받았지만 백성들에게는 어느 정도 사랑을 받은 인물이 등애였다.
오나라의 실패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위나라가 촉나라보다 오나라 공격에 관심을 가진 것이 컸다. 촉나라를 멸망시킨 것까지 포함해 위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한 것은 세 차례에 불과했지만 오나라는 여덟 차례 공격했다. 게다가 전쟁 중이 아닌 때에도 위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회남의 합비와 인근에 주둔시키고 회남과 회수에 둔전을 경작하여 식량까지 자급자족하니, 오나라로서는 병력이나 군량 면에서 모두 불리했다. 여기에 또 다른 전쟁터인 양양 일대는 낙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위나라가 대군을 주둔시켜 방어한 탓에 오나라 군사들이 쉽게 점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권력자 사마소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문무 관리들에게 유리한 그림이 그려졌다. 총사령관 종회와 촉 정복의 일등공신 등애가 제거된 덕에 그 공을 나머지 사람들이 나눠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264년 정월 모든 반란이 끝나고 촉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등애와 종회가 제거되자 사마소는 2월 낙양으로 돌아갔다. 위나라는 촉나라 부흥운동을 겪은 다음 그것의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를 강구했다. 결론은 지배층과 백성 일부를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요컨대 교통로로 많이 이용했던 진창도(고도)와 진령 서쪽의 상대적으로 평탄한 곳으로 우회하는 길이 관중에서 파촉으로 남진하는 주요 교통로였고 성공 확률도 높았다. 오히려 사곡과 낙곡, 자오곡을 통해 한중군을 점령했던 종회의 경우가 예외적인 성공 사례였다. 즉 포사도, 당락도, 자오도를 이용한 진격로는 험한 진령 때문에 성공할 확률도 낮았고 실제로도 덜 이용되었다. 그래서 촉나라가 더 허를 찔렸는지도 모르겠다.
중국 역사에서 오늘날 난징(남경) 혹은 임안에 수도를 정한 남방 세력(오, 동진·남조의 여러 나라, 남송, 남명)과 북방 세력의 각축은 대개 북방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위진남북조시대라는 장기 분열의 시기에는 동진과 십육국, 남조와 북조 등 남방 세력과 북방 세력이 남북에서 대결했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진인각陳寅恪은 그 이유를 ①남쪽의 경제력이 북쪽보다 부족했고, ②남쪽의 군사력이 북쪽보다 약했으며, ③군량과 군수품의 수송이 곤란했고, ④강남 사람들의 북벌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북벌에 실패했다고 보았다.
서진과 후한을 비교하면 지배 면적이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시대에 행정구역의 수는 늘었고, 호수와 인구는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주와 군의 수가 늘어나면 장관과 차관을 비롯한 관리들의 수가 대폭 늘어난다. 이는 벼슬을 원하는 지배계급의 이해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삼국시대 세 나라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한, 즉 대토지와 노비, 소작인 등을 소유한 지배계급의 이해를 반영하여 국가가 호구 파악을 철저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지배계급에게 세금 면제, 탈세의 기회를 제공했다.
팔왕의 난은 서진의 붕괴에 크게 기여했다. 19-6의 계보에서 볼드체로 굵게 표시된 것이 8명의 종실 제왕이다. 팔왕의 난에 대해 일일이 서술하려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생략하겠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권력투쟁에 참여한 가황후 일파와 7명의 왕이 차례로 제거되고, 최후에 승리한 동해왕 사마월이 권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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