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과학사 연구서에 따르면, 이미 이때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연료로 사용한 석탄과 증기기관이 제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런데 산업혁명보다 2,000여 년 이전에 파촉 지역에서는 석탄보다도 고급 에너지원인 천연가스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이 근현대 중국의 불행이었다.

전국시대와 후한시대 혹은 위진남북조시대의 도량형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런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면죽현과 낙현의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은 전국시대 평균의 20~30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파촉에는 매우 비옥한 땅이 많았다. 그리고 지도 16-7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러한 무논과 비옥한 땅은 성도 북쪽에 몰려 있었다. 이 지역은 익주, 즉 촉나라의 경제적 핵심 지역이었을 것이다.

전국시대 진나라 때부터 이미 국가에서 성도의 비단 생산을 감독했을 정도였다. 한나라 시대에도 성도의 비단은 ‘촉금 蜀錦
’이라고 불리며 유명했고, 이 때문에 성도는 비단의 도시, 즉 ‘금성 錦城’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오나라는 3주, 38개 군급, 262개의 현급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와 달리 『삼국회요』에서는 4주 43군 331현, 혹은 4주 47개 군급, 339개 현급의 행정구역이 있었다고 말한다.

오나라의 호수는 후한시대의 27.4%, 인구는 29.5%(242년) 혹은 28.3%(280년)에 불과했다. 이는 오나라 지배층의 절반 이상이 대토지를 소유한 강동의 토호 세력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호구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구 파악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수많은 산지 때문이었다. 광활한 황회해평원(화북평원)과 달리 장강 유역에는 산이 많았다. 관청의 수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는 산간 지역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오나라의 행정력이 산지 곳곳에까지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촉군은 한족(중국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월지月氏와 강거康居, 파촉의 이민족인 종수
??, 남만을 평정한 후 데려온 청강靑羌
등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혼성부대였다. 여기에 전한시대부터 용맹을 떨쳤던 부릉군 출신 3,000명의 쇠뇌부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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