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방의 토착 세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파촉의 토착 세력들도 자신들의 경제력을 축내고 물자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 ‘강탈’ 행위를 싫어했다. 『화양국지』를 보면 파촉의 토착민들이 유비 사후 정치를 주도한 승상 제갈량과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 비위, 강유 가운데 유독 강유를 싫어했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유비의 장점은 말수가 적었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었으며,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셈이다. 『논어 論語』에서는 말을 적게 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래야 실수가 적고, 적을 덜 만들며, 남에게 호감을 준다. 그래서 그럴까? 호협 豪俠
, 지금으로 말하면 깡패 혹은 동네 건달들과도 잘 사귀었고, 건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반면 북조 계열인 수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오대십국 가운데 북쪽의 정통 왕조인 오대를 계승한 송나라(북송)는 정신적 고향인 중원을 장악했기 때문에 정통성의 기준을 혈통보다 중원의 장악에 두었다.

남송시대에도 속지주의보다 속인주의를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다시 위나라보다 촉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이러한 시대적 저류는 주자학의 아버지 주희가 쓴 『통감강목 通鑑綱目
』에 반영되었다

위나라가 망하게 된 계기는 조예가 죽기 전에 어린 아들 조방을 보좌할 후견인을 잘못 정한 데 있었다. 조예는 본래 조조의 아들이었던 연왕 燕王 조우 曹宇
와 조휴의 아들 조조 曹肇
, 조진의 아들 조상에게 조방을 보좌하게 하고 사마의를 바깥으로 내보내 관중에 주둔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해져 측근인 유방
劉放과 손자 孫資
의 말을 듣고 조우와 조조를 내치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공동으로 조방을 돕도록 했다

손권이 말년에 군사적인 측면에서 고생한 것은 그의 무능 때문이라기보다 훌륭한 장군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175~210년)는 손권이 29세인 210년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분지계의 계책을 내놓은 모사이자 장군인 노숙(172~217년)은 손권의 나이 36세인 217년 46세로 타계했다. 형주를 점령한 여몽(178~219년)은 손권의 나이 38세인 219년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숙을 명장이라고 평가하지 않지만, 형주의 분할을 두고 관우와 대치한 용기와 관우가 노숙의 군대를 쉽게 이기지 못한 것을 보면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노숙을 제외한다고 해도 주유와 여몽이 너무 일찍 죽었다. 손권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손권은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실수를 거듭했다. 가장 중요한 실수는 태자 손화孫和와 동생 손패孫覇의 후계자 다툼을 수수방관한 것이다. 15-10의 계보에서 볼 수 있듯 본래 태자는 손등孫登이었으나 241년에 병들어 죽고 만다. 그러자 손화가 242년 태자가 되었다. 손화와 손패가 파당을 만들어 정쟁을 벌이자 손권은 손화를 태자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손패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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