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은 유비에게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신하였지만 유비가 싫어하는 직언도 마다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황제나 왕, 상관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나 부하를 원하지만 자기에게 대놓고 간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자룡은 바로 그런 사람, 직설적이고 신랄한 직언을 아끼지 않은 충직한 사람이었다.

소설에서는 관우 및 장비의 살해와 관련된 주연, 반장, 마충, 부사인, 미방, 범강, 장달을 모두 죽였다(주연의 죽음은 84회에 나온다). 특히 관우의 아들인 관흥과 장비의 아들인 장포가 배신자인 부사인과 미방, 범강과 장달을 직접 죽여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고 원혼을 달랬다. 그러나 『삼국지』에 따르면 반장은 234년, 주연은 249년에 죽었다. 참고로 이릉 전투는 221년에 있었으니 반장과 주연은 이릉 전투 이후에도 살 만큼 살다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마충·부사인·미방·범강·장달이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이릉 전투에서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비와 제갈량뿐만 아니라 약간의 군사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촉한군의 군사 배치가 잘못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비의 무식이나 노망 때문이 아니었다. 지형상의 한계 때문이었다.
요약하면 촉한군은 길게 늘어선 군영 때문에 8만 대군의 병력을 집중하여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강 지형도를 보면 그런 군영들이 고립된 지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군영을 목책으로 만들어 화공에 취약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육손은 당연히 화공법으로 촉한의 군영을 동시에 공격했다.

한 학자는 이릉 전투가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먼저 개와 고양이처럼 촉나라와 오나라가 싸우고 반목했지만 위나라의 강대함과 대비되는 촉나라의 쇠약, 오나라의 고립 때문에 두 나라는 감정을 버리고 도리어 연합해 위나라에 대항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로 오나라는 형주 방어에 성공하고 오나라와 촉나라의 연합을 통해 촉나라가 형주를 침입할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위나라와의 싸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나라와 촉나라의 연합은 위나라와의 세력균형을 이루게 하여 삼국정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하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지도자라니. 복수를 ‘사랑’하는 중국인들이 반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이에 착안한 삼국지의 작가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서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감행했던 이유를 형제애에서 찾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의형제였기에 피가 섞인 형제와 다름없다고. 게다가 의형제를 당연시하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이들의 상상력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소설의 작가나 청중 혹은 독자들은 세 사람이 의형제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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