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 가지 포인트를 덧붙였다. "역사를 통해 자원의 흐름에 대한통제는 전략적 중요성을 가졌다. 중동 국가들은 중요한 에너지원에 대한통제권을 주장함으로써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서방에 대한 발언권을 되찾게 될 것이다." 플랙은 자신이 현 상황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죄악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 P330

세계 전역의 수요가 한정된 공급량을 놓고 경합했기 때문에 시장가격은 공식가격을 상회했다. 이는 20년간에 걸친 과잉생산 시대의 종언을고하는 결정적인 변화였다. 오랫동안 시장가격은 만성적인 과잉 생산을반영해 공식가격을 하회했고, 이것은 기업과 정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수출국들도 이 새로운 파도에 편승하고자 했다. 공식가격과 시장가격의놓고 보지는 않았다.
- P336

석유 금수조치가 절정에 달했던 12월에는 일일 1,580만 배럴만 생산함으로써,
시장 공급 물량은 일일 500만 배럴이 감소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이에 대처할 여유 능력이 전혀 없었다. 6년 전인 1967년의 6일전쟁 때 여실하게증명되었던 석유와 정치의 중대한 역학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미국의 석유 여유 능력은 전후 에너지 위기 때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서구의 에너지 여유분 확보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제 미국은 세계 석유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중요한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란을 필두로 한 산유국들은 생산량을 일일 총 60만 배럴까지 증산할 수 있었다.  - P372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만큼의 부를 축적한 수출국들은 어지러울 만큼 엄청난 지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산업화, 사회간접자본, 서비스, 생필품, 사치재, 무기, 낭비, 매수 등온갖 종류의 지출이 난무했다. 눈덩이 같은 지출과 함께 모든 항만에서는 선박들이 하역하기 위해 몇 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온갖 물건과 서비스를 팔려는 장사꾼들이 서방 공업국에서 석유 수출국으로 몰려들었다.
호텔에서는 방을 구하려고 아우성이었고, 정부 관료들을 만나려고 그들의 사무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석유 수출국에 팔 수 없는 물건이란 없었다. 무기 거래는 그중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 P404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다른 중요한 형태가 있었다. 이윤은 상류 부문인 원유와 천연가스의 생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이나 북해 지역에서 한 회사가 보유한 매장량의 가치는 석유 가격과 함께 상승했다. 정유업, 수송업, 주유소 등 하류 부문의 경우, 1973년 이전에는 연평균 7~8%의 소비 증가를 기대하며 투자되었다. 그러나 실제 소비 증가는 이에 따르지 못했으므로 하류 부문의 능력은 필요를 넘어섰다. 예를 들면 유조선단의 3분의 1이 과잉 상태였다. 중동원유에 대한 지분 손실과 함께, 이러한 상황은 국제 석유회사들이 유럽에 건설했던 대규모하류 부문 투자에 대한 적정성과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 P442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동기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다.
- P453

이란 국왕은 1968년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한 비종교적인 바스당 체제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라크와 이란 양국의 최대 현안은 샤트 알 아랍,
이라크 영내를 흐르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과 이란 영내의 하천 몇개가 만들어낸 삼각주 지대를 둘러싼 문제였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120마일에 걸친 양국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샤트 알 아랍의 삼각주지대에 건설된 아바단 정유소를 보유한 이란으로서는 페르시아 만으로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출구는 아니었다. - P516

호메이니와 측근은 세속적인 사회주의자 집단인 바스당 자신들의 증교적 신념에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바스당 운동을 ‘인종을 차별하는 아랍주의 사상‘이라고 공격했다. 호메이니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난쟁이 파라오‘라는 신랄한 용어를 구사하며 후세인을 비난했다.
사담 후세인에게는 호메이니의 비난을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라크인의 절반 이상이 시아파 교도인 데 반해 바스당은 비종교적인 체제로 소수인 수니파 교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가장 신성시하는 성지인데, 이란에서 오는 시아파 교도들 사이에 동요가 심해지고 있었다. 1980년 4월에 발생한 부수상 암살미수 사건을 빌미로 후세인은 이라크 국내에서 가장 이름 높은 시아파의지도자를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더불어 그의 누이까지 처형했다.  - P520

OPEC의 최전성기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OPEC 회원국도, 산업계도, 서방측의 석유 소비국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카터 정권도 함께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미 카터는 이란에 의해 대통령 재임 중 마지막 굴욕을 맛보고 있었다. 테헤란의미국 대사관에 감금되어 있던 인질은 그가 대통령직을 물러날 때까지 석방되지 않았다. 뒤를 이어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의 넘쳐흐르는 자신감과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신뢰감은 카터에게 붙어다니던 ‘심기 불편 보다 유권자의 마음을 훨씬 강하게 사로잡았다. - P528

세계 석유시장과 석유 가격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악성 인플레이션이 서방 세계의 경제뿐 아니라 전체 사회 구조를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의 연방준비국은 과도한 긴축금융 정책으로 대응했고, 이에 따라 이자율이 급등해 최고 21.5%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긴축금융과 석유가격 상승으로 산업계의 자금이 고갈되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과 1982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이 두 번 닥쳤고, 그중 1982년이 더 심각했다. 경제 활동이 수렁에 빠져들자 선진 공업국에서의 석유 수요는 계속감소했다. 개발도상국들이 유가를 상승시킬 중요한 신규 수요원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 역시 선진국의 경제 침체에 따른타격으로 동반 침체에 빠져들었고, 따라서 석유 수요는 늘지 않았다. - P533

게다가 에너지 경제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과 1940년대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에너지 부족에 대한 공포는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유전의 개발이 촉진되었고 그 결과 공급 과잉이 초래되었다. 이런 패턴은 석유 가격이 배럴당 34 달러가 되고, 더 높은 가격 인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규모 신규 개발은 OPEC 외부에서 일어났다. 멕시코, 알래스카, 북해의 생산 시설 증강은 제2차 석유 파동 와중에 이루어졌다. 이집트 역시 주요 석유수출국이 되었고 말레이시아, 앙골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국가들이 생산국과 수출국의 작은 부분으로 참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술 혁신 역시 개발과 생산, 운송 능력을 증진했다.  - P533

석유산업 구조 개편의 핵심은 ‘가치의 공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가치의 공백‘이란 회사의 주가가 회사 소유의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의 시장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용어다. 주식 가격과 자산 가치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기업에게 치명적이다. 새로운 경영 방식을 통해 과거의 경영이 하지 못했던 ‘주주들의 가치‘ 증대를 도모할 수있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탐사에 의해 석유를 1배럴 추가하려면.
기존에 운영되는 자산을 구입하는 것에 비해 2~3배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멕시코 만이나 텍사스에서 탐사를 하는 것보다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 석유를 구하는 것, 즉 평가절하된 회사를 매입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여기에서도 ‘주주들의 가치‘가 추진력이 되었다. - P547

자국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99%를 수입하는 일본은 가능한 한 최저가격을 선호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낮을 경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대체에너지 부문의 투자를 줄여서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결국 새로운 취약성을 노출해 또 다른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둘째, 석유는 일본의 수입품 중 상당부분을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가격은 막대한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더욱 확대할 것으로 보였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와의 심각한 갈등을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의 석유업계와 정부는 대체로 8달러가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 P600

이라크는 폐쇄적인 경찰국가였으나 후세인이 목표하는 바는 명확했다. 페르시아 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아랍 세계를 지배하고,
이라크를 석유 대국으로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인 군사 대국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는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후세인이 일으킨 이란-이라크 전쟁이 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교착 상태에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1,800만 명의 국민 중 100만명이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후세인은 고유가 정책을 지지했고, 그것도 즉시 시행되기를 바랐다.  - P618

이 위기가 1990년대와 21세기에 미치게 될 영향은 엄청날 것으로 보였다. 만약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수중에 넣는다면 OPEC 생산량의20%와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20%를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주요 석유수출국들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는 위치를 점하게 될것이다. 페르시아만의 패권을 장악한 후세인이 이란과의 전쟁을 재개할가능성도 높았다. 그가 또 다른 행동을 취해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P621

 석유의 역사는 승리의 파노라마와 비극적이고 값비싼 희생을 치른 오류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의 고귀한면과 비열한 면을 모두 보여준 하나의 무대였다. 창조성 ·헌신 · 기업가정신 · 독창성 · 기술 혁신이 탐욕 · 부패 · 맹목적인 정치적 야심 • 폭력 등과 함께 존재했다. 석유는 물질세계를 지배할 힘을 부여했다. 석유는 농약이나 연료로 형태를 바꾸어 인류의 의식수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또한세계 정치와 경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류는 많은 피를 흘렸다. 석유를 손에 넣어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싸움은 석유가 중심적 위치를 유지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 문명의 모든 측면은 석유의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연금술의해 변화되어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바로 석유의 시대다. - P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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