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와 『후한서』의 유표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표를 평범하면서도 관도 전투 때 원소와 조조 사이에서 간을 본 기회주의자이자 황제 놀이를 했던 역적으로 묘사한 반면, 후자는 유표가 형주에서 선정을 베풀고 헌제를 돕고 조세를 낙양 조정에 보낸 충신으로 기록했다. 『삼국지』는 유표가 먼저 헌제를 도왔다는 기록을 누락함으로써 조조만이 헌제를 도운 유일한 군벌이라고 부각시킬 수 있었다.

유표의 선정을 역사의 기록에서 지워버린 『삼국지』를 보면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테러의 신랄함을 절실히 느낀다. 로마에서 가장 심한 형벌은 사형이나 재산 몰수가 아니라 역사와 기록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정사와 소설에 기록된 적벽대전의 상황을 보면 조조의 수군은 수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화공에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가에 정박해둔 상태에서 화공을 당했다. 좁은 공간에 수백 척의 배를 정박해두었으니 배들은 서로 닿을 정도로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배를 묶어놓지 않았다고 해도 황개의 군사들이 불을 질러 조조의 전함으로 돌진하고 바람까지 불면 밀집한 배들에 불이 옮겨 붙기 쉬웠을 것이다.

손권은 북벌을 위한 교두보를 택한 반면 유비는 실리를 취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손권이 남군 전체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고 반격 또한 조조군에 막혔다. 반면 유비는 알짜배기 강남 4군을 점령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유비의 인생은 제갈량 영입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확연히 달라졌다. 제갈량이 유비와 유비 부하들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업적은 거기까지였다. 융중대에서 말한 천하삼분은 실현했으나 천하통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천하통일의 실패를 제갈량의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북벌의 실패, 관우의 죽음과 유비의 무모한 복수전 등 아마 융중대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장로가 순순히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나름대로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장로는 조조와 부하들에게 오두미도를 포교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의 아들이 세운 위魏나라와 사마의의 손자가 세운 진晉나라의 지배층 가운데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특히 동진과 남조 시대 최고 문벌인 낭야瑯? 왕씨王氏는 대대로 도교를 신봉했다.

『삼국지/장비전』에서는 유비가 익주 평정의 일등공신인 제갈량, 법정, 관우, 장비에게 각각 금 500근과 은 1,000근, 동전 5,000만 전, 비단 1,000필을 하사하고 나머지 장수와 관리, 병사들에게도 차등해 지급했다고 기록했다. 또 여러 부하가 성도성 안에 있던 집과 성 밖의 논밭, 과수원, 채소밭 등을 장수들에게 나눠주자고 건의했지만 유비가 조운의 진언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고 하는데, 배송지주에 인용된 『조운별전』의 이 기록대로라면 유비의 군대는 성도의 재산을 탈취하고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한 도적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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