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1 -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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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리비우스)는 독자들이 우리의 조상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어 그 후 계속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사용했는지 등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를 촉구한다. 그런 다음 우리나라의 도덕적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먼저 오래된 가르침이 무시되면서 도덕적 기반이 붕괴한 과정,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진 신속한 해체 과정, 이어 도덕적 세계관의 전면적 붕괴 과정을 살펴보기 바란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음울한 시대가 어둡고 울적한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악덕을 견디지도 못하고 또 그 악덕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해낼 용기도 없다. 역사의 연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서문 , p20/766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1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1~5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로마 창건부터 BCE 390년 알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대파시키고 일시적으로 로마를 점령하기까지의 시기를 다룬 이 책에서 우리는 저자의 집필 의도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관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한 우리 시대의 악덕(惡德)이다. 공화주의자로서 로마 내전시기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BCE 106 ~ 48)를 지지했던 저자 리비우스가 생각했던 악덕은 무엇이었을까? 이번 리뷰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리비우스는 <로마사> 의 서문에서 오늘날의 시대는 음울하게 타락한 시대라고 말했다. 그가 여기서 말한 시대는 구체적으로 후기 로마 공화정의 시대, 즉 술라 이후 마리우스를 거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내란을 벌이고 다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내전을 벌인 시기를 가리킨다. 수많은 구국의 영웅을 배출한 로마 공화국이 왜 이렇게 퇴락했을까?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작품해설 , p751/766


  <리비우스 로마사 1>에서 리비우스가 말한 악덕이 가장 잘 표현되는 부분은 집정관 퀸크티우스의 대중 연설 부분이라 생각된다. 외적들에 의해 연이어 패배를 당하면서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귀족을 대표하는 집정관은 다수가 평민들인 대중들에게 위기의 책임을 묻는다. 평민들이 원해서 10인 위원회도 설치했고, 호민관 제도도 시행되었으니 귀족들은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대체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가? 이러한 집정관의 질문은 다수인 평민을 넘어서 상대적 소수인 호민관을 향했다고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아래의 호민관 가이우스 테렌틸루스 아르사의 대중 연설에서 드러나듯, 호민관들은 집정관과 원로원 정치에 강력한 견제 장치로 작용했으며 집정관/원로원의 권력과 평민들의 자유의 대립은 <리비우스 로마사 1> 전체에서 반복되는 소재이자 주제다.


 여기서 진실을 말해 보자면, 우리의 공공 생활은 정치적인 불화와 계급 갈등 때문에 타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적들에게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자유를 향한 욕망과 우리의 권력을 향한 욕망이 끝없이 충돌하고, 그래서 서로를 대표하는 행정관들을 증오하는 모습을 외적들은 전부 지켜봤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십니까?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433/766


 이들 계급간의 갈등이 로마 공화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면, 이들 중 어느 편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할까? <리비우스 로마사 1>에서 저자 리비우스는 평민이 아닌 귀족들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로마 내전 당시 원로원의 수호자로 자처했던 폼페이우스를 지지했을만큼 강력한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생애를 생각해봤을 때 이러한 추론이 크게 무리하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본문 여러 곳에서 호민관과 평민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귀족 계급의 오만함을 격렬하게 성토했고 또 두 집정관의 과도한 권력을 특히 비난했다. 그런 권력은 자유로운 공동체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정관은 왕보다는 덜 혐오스러운 말이지만, 실제로는 집정관 정부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운영하므로 군주제보다 더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두 집정관은 무책임하고 무제한인 권력을 행사하며 정작 그들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견제가 가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평민을 압제하기 위해 법률이 정한 처벌을 마음대로 내리면서 법에 의한 테러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308/766


 특히, 리비우스는 호민관의 역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듯하다. 원로원 의원들의 입을 빌려 서술된 호민관에 대한 내용은 그들이 포퓰리스트(Populist)들이며, 정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신출내기들이 1년이라는 짧은 임기동안 주어진 특권을 남용해서 로마의 국가 체계를 뒤흔들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평민과 귀족들 모두가 화합하는 상황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인식을 하는 호민관들의 모습은 그들을 공화정의 적(敵)으로 인식하는 리비우스의 인식이 반영된 대목이라 여겨진다.


 아시다시피 저의 할아버님께선 호민관의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원로원에 제시하셨습니다. 그건 바로 그들 중 일부를 포섭하여 동료의 제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지요. 권력을 처음 맛본 자들은 위대한 정치 가문의 사람이 비위를 맞춰주는 방법으로 접근하면 쉽게 마음을 바꾸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잠시 신분에 맞는 위엄은 잊고 요령 있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552/766


 당신이 집정관의 권위를 가증스럽고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몰아붙이는데, 오히려 호민관의 권위가 그렇습니다. 호민관의 권위는 한때 원로원과 조화를 이루었고 그래서 원로원의 적절한 기능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의 타락한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미 시작한 노선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당신에게는. 하지만 나는 다른 호민관들에게는 호소하겠습니다. 호민관의 권력은 도움이 필요한 개인들을 도우라고 주어진 것이지, 공화국 전체를 파괴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310/766


 이 혁신적인 조치로 인한 기쁨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평민은 원로원 회의장에 몰려들어 밖으로 나오는 의원들과 악수하며 그들을 실제로 아버지라 불렀다(모든 의미에서). 그들은 또한 지금부터 이런 관대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여력이 있는 한 몸과 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이 선물은 두 가지 이유로 환영받았다. 법의 구속력 때문에 병역에 몸이 매인 가난한 병사는 그의 작은 재산을 늘릴 수 없었는데, 그 조치는 이런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점은 그런 조치가 호민관들이나 평민의 요구 없이 원로원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이에 평민은 크게 만족하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런 큰 기쁨과 호혜(互惠)에 동참하지 못한 것은 호민관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조치가 예상보다 그리 흡족하지 못하고 또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도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언뜻 보기에는 훌륭해 보여도 막상 경험해보면 그런 조치의 단점이 곧 드러나리라는 것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576/766


 <리비우스 로마사 1>에서 리비우스는 공화정 후반기 혼란의 원인을 이전 시대의 악덕에서 찾는다. 로마 외부의 외적이 아닌 내부의 투쟁과 갈등이 악덕이었으며, 그러한 악덕의 기원을 만족할 줄 모르는 대중의 욕심과 호민관의 야심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화주의자 리비우스의 사관(史觀)이 잘 드러난 책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호민관에 대한 부정적인 리비우스의 역사 인식이 후대 로마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1817 ~ 1903)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추정해본다. 그라쿠스(Gracchi) 형제 개혁에 대한 몸젠의 날선 비판은 리비우스의 역사관의 연장선상에 있고, 몸젠이 1968년 <리비우스 로마사> 3~6권 중 일부를 해독했음을 생각해본다면 근거가 빈약한 것만은 아니라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비우스는 다른 한편으로 혼란을 극복할 방안도 제시하는데, 바로 종교(宗敎)다.


 "재앙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우리의 종교를 기억했습니다. 우리는 지고의 신 유피테르의 안식처 옆의 카피톨리움 언덕으로 가서 신들에게 보호를 청했습니다. 우리의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후 우리는 성물들을 묻거나 다른 도시로 가져갔고, 적은 그리하여 성물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비록 신과 인간에게 버림받았지만, 우리는 신들을 숭배하는 일을 절대 멈추지 않았습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690/766


 악덕을 벗어나 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리비우스가 역사서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라 생각된다. 마치 바빌론 유배를 겪었던 유대인들이 이후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신명기계 역사서를 편찬했듯, 리비우스 또한 신 중심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차이가 빚어낸 서로 다른 결과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신교의 헬레니즘과 유일신교의 헤브라이즘. 헤브라이즘 역사관의 결과가 전쟁신인 야훼로 지향을 끌어냈다면, 다신교 역사관의 결과는 신적인간,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향했던 것을 아닐까. 짧았던 로마 왕정에 대한 리비우스의 인식과 사악한 특권을 상징하는 호민관을 폐지한 임페라토르(Imperator)에 대한 기대가 제정 로마에서 그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지 않았을까.


  이정도로 <리비우스 로마사 1 - 1000년 로마의 시작>에 나타난 역사가 리비우스의 관점을 정리하고, 바탕으로 이제 몸젠과는 로마인 리비우스가 바라보는 로마사의 내용을 차차 리뷰로 정리해보려 한다... 


 그런 공동체 의식 ― 유일하게 진정한 애국심 ― 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와 아주 천천히 자라난다. 그것은 가정에 대한 존경과 국토에 대한 사랑을 그 밑바탕으로 삼는다. 대중들에게 휘둘리는 이런 시기상조의 "자유"는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 성숙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소한 싸움들로 인해 사분오열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해 보자면 그런 정치적 성숙은 군주 정부 아래에서 안정된 오랜 세월이 경과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사실, 군주제 정부는 우리의 국력을 키워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자유라는 건전한 열매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자유는 오로지 정치적으로 성숙한 나라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152/766


 리비우스는 공화정의 원칙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찬양했으나 로마의 찬란한 과거를 높이 숭상한 저술 태도 덕분에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호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리비우스는 후대에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어린 클라우디우스(기원전 10년 태생)에게 역사 공부를 지도하기도 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작품해설 , p709/766

과거 여러분은 호민관을 바랐고, 평화를 지키고자 우리는 여러분의 뜻대로 그 제도를 설치했습니다. 그 뒤로 여러분은 10인 위원회를 바랐고, 우리는 그 위원회의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어 다시 호민관을 원해서 그대로 되었고, 집정관들마저도 평민의 대의를 지지하는 자를 원해서 그런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귀족이 맡아오던 최고 행정관도 우리의 적(평민)에게 공손히 양보하는 걸 지켜보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호민관에게서 보호받을 수 있고, 항소권도 있습니다. 게다가 호민관의 법령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원로원에게 부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정의라는 허명으로 우리의 모든 특권은 짓밟혔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견뎠고, 여전히 견디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을 끝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434/766

이에 호민관들은 좋은 기회를 잡았다며 평민의 불만을 부채질하는데 집중했다. 그들은, 원로원이 싸우고 있는 진정한 적은 베이이나 다른 외적이 아니라, 로마의 평민들이라고 주장했다. 호민관들은 원로원이 할 수만 있다면 평민들에게 군복무를 강요하여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하는 등 의도적으로 평민을 괴롭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원로원이 이처럼 평민들을 국외로 파견하려고 하는 건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평민들이 본국에서 평온한 삶을 누리면 금지된 사항들, 즉 자유, 경작할 수 있는 자신의 농장, 공유지 배분, 양심에 따라 투표할 권리 등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573/766

하지만 로마의 내부 갈등은 심각하고 맹렬한 것이어서 원정의 상황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호민관들의 방해로 전쟁세는 징수되지 않았고, 병사들은 목소리를 높여 급료 지급을 요구했으나 사령관들에게 병사들의 급료가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병사들은 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귀족에 대한 평민의 분노는 더욱 대담해졌고, 호민관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젠 국가 최고위직에서 세르기우스와 베르기니우스 같은 자는 배제하여 평민의 자유를 더욱 공고히 다지자고 주장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1> , p609/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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