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내셔널리즘은 긍정적, 부정적으로 유럽의 신생국가 통합에 기여했다. 1914년 전야까지 유럽 국민국가들 내에서 보수 귀족과 중산층 그룹 간에 국민적 일체감이 다져졌다. 반면에 이들과 혁명적 사회주의 집단 간에는 갈등이 증폭되는 듯이 보였다. 그렇다면 소위 국가를 초월한다고 하는 사회주의가 독일의, 그리고 나머지 다른 국민국가들의 존립을 저해했던가?

이처럼 1914년 이전에 독일의 사회당은 입으로는 혁명을 말했지만 이 같은 거대한 독일 노조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개혁을 추구했다. 제1, 제2 인터내셔널처럼 사회주의 자체가 국제적으로 통합되는 듯 보이는 이면에서 나라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히틀러가 초래하지 않은 대공황의 산물이었다. 이 사실은 경제사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나치 정권하에서 공식적으로 실업은 해결되고 노동력 부족 사태까지 낳았다.

파시스트 우파와 비非파시스트 우파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즉 파시즘은 밑으로부터 대중을 동원하여 등장했다. 대표적 파시즘 정권이라 할 나치 정권 역시 비파시스트 우파 세력과 달리, 일반 대중에게서 확산된 민심을 동원하여 등장했다. 그런 다음 모든 정적을 물리력으로 제거했다.

왜 1차 대전 후에 급진 우파가 급격히 부상했는가? 그것은 1차 대전으로 사회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그 붕괴된 사회의 일원이던 중간 계층과 소시민층 출신 민족주의 청년들이 파시즘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사실상 현실로 받아들여졌던 사회혁명과 노동계급의 위력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파시즘은 독점자본(혹은 대기업)의 표현도 아니다. 파시즘은 결과적으로 비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자본주의경제를 운영하는 체제였다. 공산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은 인정하되 이를 국가가 대대적으로 통제했다. 이들은 대공황을 효과적으로 이겨내고(독일), 마피아를 제거하면서(이탈리아) 노동운동을 파괴했다. 파시즘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맞은 위기의 산물로 등장한 정치체제였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확실히 발달시켜본 경험이 없는 나라의 정권에게는 파시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케인스에 따르면, 1914년 이전에 유럽 번영의 대부분은 독일의 경제성장에 의존한 것이었으므로 독일을 경제적 장애자로 만드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독일에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배상금을 부과한 조항이 경제 대국인 독일 경제를 몰락시키고 결국 주변 나라를 모두 가난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에 이 조약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핫머니’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급격히 이동하도록 자극한 요인으로는 1930~1931년의 금융 위기, 여러 나라 경제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 상실과 통화가치 상실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산 보유자는 단순히 자기네 투자가치를 보호할 목적에서 엄청난 금액을 인출했다. 그러자 많은 나라가 금과 외환 준비금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 통제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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